문경지교로 잘 알려진 염파와 인상여의 예를 보면 이들은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난 이후에는 목숨을 내어 놓아도 아깝지 않은 사이가 된다. 그래서 이를 문경지교라고 한다. 그러나 장이와 진여는 이와는 정 반대로 초기에는 서로 친분이 좋아 문경지교라고 할 정도였으나 나중에 서로 사이가 나빠져 철천지 원수가 되어 버린다. 여기에서는 장이와 진여의 우정과 그들의 결말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문경지교
장이(? ~ BC 202)는 위나라 도읍인 대량사람으로 신릉군 위무기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유방을 만나 한나라의 무장이자 조나라의 왕이 된다. 그는 젊은 시절 죄를 짓고 도망 다니다가 외황에서 유부녀인 부잣집의 딸과 결혼을 하여 처가의 덕으로 외황의 현령이 된다. 그때 유학을 좋아하고 대량사람인 젊은 진여(? ~ BC 205)는 장이를 만나 아버지 처럼 따르고 친분을 쌓아 문경지교를 맺는다. 그러던 중 진나라가 위나라의 대량을 정복하였을 때 한고조 유방도 장이를 따라 빈객으로 지낸다. BC 221년에 진나라가 통일을 하자 장이와 진여는 체포령을 피해 진(陳)현으로 도망을 가 성문지기가 된다. 이들은 서로 의지하며 친분을 쌓아 나간다. 그런 인고의 10년을 보낸 후 진시황이 죽고 BC 209년 진승과 오광의 난이 대택향에서 일으나 진(陳)으로 이른다.
장초국에서
진승과 오광은 인솔자인 진나라 군사를 죽이고 겁을 먹은 농민들에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고 말하며 선동을 한다. 그 후 세를 불리어 진(陳)현에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장초국'이라 하고 진승(진섭)이 왕이 된다. 이때 진승은 장이와 진여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 장이와 진여는 "왕이 되는 것을 뒤로 미루고 바로 함곡관으로 들어가 진나라로 공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승은 왕이 될 욕심이 앞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왕이 된다. 만약 장이와 진여의 말을 듣고 진나라로 공격하였더라면 6개월 만에 진압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이 아쉬운 일이다. 그 후 장이와 진여는 이제는 할 수 없이 각지로 사람을 보내어 조나라를 치고 장초국의 세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을 한다. 그리하여 장초국의 진승은 사람을 보내 각지에 나라를 세운다. 주불은 위나라를 공격하고 위구를 왕으로 세우고, 무신은 조나라를 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장이와 진려가 그를 따른다. 그리고 한광은 연나라 왕이 되고, 전담은 제나라의 왕이 된다. 나중에 유방이 한신을 지원하여 한나라를 세워 왕이 되게 한다. 이렇듯 다시 전국은 7개 나라로 나누어지게 된다.
거록성 포위됨
조나라에서 무신을 모시고 있던 장이와 진여는 이량의 반란으로 무신이 죽자 한단성을 탈출하여 신도에 자리를 잡고 조헐을 조나라 왕으로 옹립한다. 이때 진나라 장한(장함) 장군이 여산에 진시황릉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을 훈련시켜 조직한 군대로 반란군을 진압하기 시작하여 항우의 작은 아버지인 항량을 죽이고 한단성을 공격하여 정복하자 장이는 거록성으로 도망가고 진여는 북쪽 상산땅에 수만의 군대를 모아 주둔한다. 그 후 장함의 진나라 군사는 북쪽에 있는 왕리와 함께 조나라의 거록성을 공격하여 포위한다. 성안에 포위되어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던 장이는 진여에게 장염과 진택(진석)을 보내 포위하고 있는 진나라 군사를 뒤에서 공격하라고 한다. 그러나 진여는 "지금 공격을 하면 헛되이 군사만 잃게 된다. 내가 지금 치지 않는 것은 후일 조왕과 장이를 위해 조나라의 복수를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하며 움직이지 않는다. 이에 장염과 진택이 후일보다 신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자 그들에게 군사 오천명을 주며 싸우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장함의 진나라 군사들에게 몰살을 당하고 장염과 진택마저 죽게 된다. 할 수없이 조나라왕과 장이는 초왕 미심에게 구원을 청한다. 결국 연, 제, 초나라의 연합군인 항우의 연합군이 오게 된다.
거록성 전투
초왕 미심은 조나라 구원군으로 송의를 상장군으로 하여 항우를 차장으로 전쟁에 보낸다. 그러나 항우가 송의를 죽이고 스스로 상장군이 된다. 그리고 거록성을 지원하려고 장하강을 건넌다. 항우의 군대가 막 장하를 건넜을 때였다. 항우는 갑자기 배를 부수어 침몰시키고 솥도 깨뜨려 버리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3일 분의 식량을 나누어 준다. 이제 돌아갈 배도 없고 밥을 지을 솥마저 없었으므로,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여기에서 "파부침주(破釜沈舟)", "파부침선(破釜沈船)", "기량침선(棄糧沈船)"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게 된다. 그 결과 항우는 보급도로인 용도와 거록성을 포위한 진나라군을 공격해 9번 싸워 모두 승리하고 진나라 장수 소각, 섭리는 죽이고 왕리는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둔다(BC 208). 이후 여러 제후국들은 항우를 섬기게 된다.
원수가 됨
거록성 전투에 항우의 승리로 두 사람이 만나게 되자 장이는 진여에게 두 사람의 생사에 대해 묻고 왜 공격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따진다. 그러나 장이는 진여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에 화가 난 진여가 군사 지휘 인장을 반납하자 장이는 그대로 수락을 한다. 그 후 진여는 물러나서 낚시나 하고 장이는 항우를 따라 함곡관으로 들어간다. 항우는 장이를 조나라를 이등분하여 상산왕으로 봉하고 신도를 다스리게 한다. 그리고 진여는 남피지역의 세 현의 제후가 되게 한다. 이후 진여는 제나라의 전영의 군사를 얻어 장이의 상산국을 공격하자 장이는 도망을 가 유방에게로 간다. 이때 유방은 항우의 군사에게 도망 다니는 시기였다. 그런데 유방이 진여에게 초왕 항우를 같이 치자는 제안을 하자 진여는 장이의 목을 조건으로 내세운다. 이에 유방은 장이와 닮은 사람의 목을 주고 동맹을 맺게 된다. 그러나 팽성전투 이후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진여는 다시 항우의 편이 된다. 결국에는 한신이 북벌을 할 때 장이가 함께 참여하여 정형전투에서 조왕과 진여를 잡아 목을 벤다. 이렇듯 장이와 진여는 어려울 때 문경지교로 불릴 정도로 서로 좋아하던 사이가 결국에는 장이가 진여의 목을 베어 죽이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장이와 진여의 문경지교 시기 그리고 서로 원수가 되는 시기를 살펴보았다. 사마천은 "장이와 진여는 현자로 그의 식객에는 천하의 준걸이 아닌 사람이 없었는 데 그들은 어려울 때에는 문경지우이었으나 나중에는 배반하는 부조리에 빠지게 된다. 이는 형세의 변화에 따라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이다. 이들은 오나라의 태백이나 연릉의 계자의 겸양의 정신이 없어 서로 교만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한다. 이들은 관포지교의 관중과 포숙아처럼 포숙아는 관중을 신뢰하여 끝까지 믿어 주었다. 즉 장이와 진여는 그러한 겸양의 정신이 없었기에 형세의 변화에 따라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 서로 죽이는 원수가 되었다. 우리 현대인들도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친구 간에도 겸손과 양보 그리고 믿음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 역발산기개세 '항우'와 홍문지연, 일거양득, 건곤일척, 사면초가, 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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