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월은 원래 호수가에서 도적질하는 수적으로 시작하여 한 고조 유방이 항우에게 쫒겨 다닐 때 항우를 후방에서 괴롭히고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유격전으로 그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개국공신이다. 여기에서는 유격전과 역습의 대가 팽월의 생애과 업적 그리고 그의 사망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생애
팽월(? ~ BC 196)은 중국 초한쟁패기 때 위나라 창읍사람으로 거야택이라는 큰 호수에서 무리를 이루어 도적질을 하는 수적으로 한 고조를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나고 항량이 거병하자 거야택의 젊은 무리들이 팽월에게 거병하도록 권한다. 누차 거절하다가 승낙하면서 가장 늦게 온 자의 목을 베고 제단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 패공 유방이 창읍을 공격하자 유방을 도왔으며 창읍은 함락되지 않았고 유방은 관중으로 갈 때에는 팽월은 그대로 남아 위왕 위구가 자결한 후 떠돌아다니는 패잔병들을 모은다. 이와 같이 팽월은 카리스마가 있고 강력한 리드쉽을 가진 사람으로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팽월의 활약
기원전 206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함양에서 각 제후들을 봉할 때 서쪽 파촉지방에는 유방, 제나라 땅에는 전영, 위나라(양나라)지역에는 팽월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버려지자 이에 반기를 든다. 팽월은 불만을 품은 전영에게서 군대 지위권을 받아 제음에서 초나라를 공격해 조나라 장수 소공 각의 군대를 대파한다. BC 205년 한왕 유방이 위구의 동생 서위왕 위표 등 여러 제후들과 함께 서초를 치러 오자, 팽월은 군사 3만 명과 함께 외황에서 유방에게 귀속한다. 이때 유방의 중재로 위표는 서위의 왕이 되고 팽월은 상국(재상)이 되어 옛 위나라 땅인 서초에 편입된 양나라 일대를 평정한다.
· 유격전 전개
항우가 군사 3만으로 유방의 제후연합군 60만을 공격하여 팽성에서 대승을 한다. 대패한 한왕 유방은 형양성에서 항우에게 포위되어 가까스로 진평의 계략으로 탈출을 하여 성고에 간다. 여기에도 지게 되어 가지고 있던 모든 성을 잃고 도망을 다니다 한신으로부터 군사를 얻어 황하 유역의 완성과 섭읍 사이에 보를 쌓고 다시 지루한 장기전을 벌이며 대치를 한다. 이때 팽월은 한나라 유방 편에 서서 유격전을 펼쳐 양도(식량보급로)를 공격하여 초나라 군대의 군량을 끊는 등 항우의 후방을 괴롭힌다.
· 17개 성을 함락
BC 203년 한왕과 서초패왕이 공성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초나라의 동아를 공격해 초나라 장수 설공을 죽여 수양·외황 등 17개 성을 함락시킨다. 한편 한왕은 자신의 형 유고와 절친 노관에게 2만의 군사와 수백의 기병부대를 주어 초나라 지역에 침투를 시켜 초나라의 군량을 태우게 한다. 이로 말미암아 항우는 후방이 불안하여 형양, 성고를 지나 함곡관으로 공격을 할 수 없게 된다. 이후 한왕은 잃은 성고를 회복하고 광무까지 진격했다. 서초패왕이 한왕에게로 돌아가 광무서 대치하자, 다시 일어나 수양·외황 등 17개 성을 점령하여 또 양나라 땅을 차지하고 초군의 군량을 끊었고, 결국 서초패왕은 조구에게 "성고를 지키되, 한나라가 쳐들어오더라도 싸우지 말고 동쪽으로 오지 못하게만 하시오. 나는 15일이면 팽성을 차지하고 양나라를 평정할 것이니, 돌아와서 장군과 합류하겠소."라고 말하고 팽월을 공격한다. 그러자 팽월은 곡성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항우에게 17개 성을 완전히 평정되기 전에 한왕 유방이 조구를 치고 성고성을 빼앗는다. 그러자 항우는 다시 대치하러 돌아간다.
· 군량미 공급
이러한 팽월의 유격전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결국 항우는 군량이 궁해져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BC 202년에 한왕과 천하를 이등분하기로 협정을 맺고 양하로 옮긴다. 그러자 팽월은 창읍 일대 20여 성을 빼앗고 10만 곡식을 얻어 한나라 유방에게 군량미로 공급한다. 이때 한왕은 서초 군이 피폐해졌다고 판단하고, 협약을 깨고 추격하면서 팽월과 한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팽월은 위나라 병사들이 서초를 두려워한다는 핑계로 출전하지 않았고, 한신도 출전하지 않아 한나라 군대가 고릉전투에서 서초패왕 항우에게 지게 된다.
· 해하 전투 참전
한왕 유방은 팽월에게 양나라 땅, 한신에게 제나라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자 그제야 군사를 내어 해하에서 한나라 본대와 합류하여 마침내 해하전투에서 항우는 자결함으로써 천하는 유방이 통일하게 된다. 이후 팽월은 한왕 유방으로부터 양나라 왕으로 봉해지며 도읍은 정도에 두게된다.
※ 항우 유방의 천하 자웅 초한전쟁 - 팽성, 해하전투, 광무, 영양대치
팽월의 사망
나라가 점점 안정되어 가자 한고조는 점점 제후들이 점점 눈에 거슬리며 위협이 된다. 이에 한고조는 하나씩 이들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BC 197에 진희의 반란이 일어나자 한고조는 직접 진압을 하러 가면서 양나라 팽월에게 출병하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나 팽월인 병을 핑계로 위거 등 부하 장수를 보낸다. 이에 한고조가 화를 내자, 부하 장수 호첩이 모반을 권하나 팽월은 거절한다. 그런데 팽월의 신하 태복이 달아나 "양왕이 모반할 것이다."라고 한고조에게 고한다. 이에 유방은 팽월을 사로잡아 낙양으로 압송한다. 그 결과 팽월은 서민으로 강등되어 촉으로 유배를 가던 중에 여태후를 만난다. 그는 여태후에게 무죄를 읍소하고 고향 창읍에 가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을 한다. 그러나 여태후는 그를 속이고 다시 낙양으로 데려가 그의 목을 베고 죽여 젓갈을 담근다. 그리고 삼족을 모두 죽인다.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유격전의 대가 팽월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팽월은 도둑의 수괴로 시작하여 양나라의 왕이 된 사람이다. 그는 유격전과 역습의 대가로 유방을 위기에서 구함으로써 한나라 유방이 나라를 건국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개국공신이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이 되자 황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져 한신과 함께 여태후에 의해 토사구팽 된 대표적인 사람이다. 사마천은 팽월을 위표와 같은 레벨로 평가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위표는 상황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지만 팽월은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부하의 반란 권유에도 거절하고 유방과의 의리를 지킨 사람이다. 그러나 팽월은 한나라가 안정되고 태평성대가 되기 위한 전 단계인 왕권을 강화하는 기간에 희생된 사람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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