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25대 국왕 충렬왕(忠烈王, 1236 ~ 1308)은 원종과 정순왕후 김씨의 장남으로 이름은 심(諶)이다. 재위기간은 1274년 7월부터 1308년 8월까지 14년 중에 7개월이 빠진 33년 5개월이다. 충렬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국으로 고려의 자주성 유지하며 외교적 안정을 도모한다. 고려의 관제를 개편하고 중앙집권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군사력을 강화하여 왜구와 여진의 침입을 격퇴하며,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2차에 걸친 몽고의 일본 원정을 지원한다. 또한 자비령 이북(서경) 지역과 탐라(제주)를 원나라로부터 돌려받아 고려의 영토를 회복한다.

출생과 즉위
· 출생과 즉위 전
충렬왕(忠烈王, 1236 ~ 1308)은 원종과 정순왕후 김씨의 장남으로 본명은 왕거(王昛)이며, 초명으로는 왕심(王諶) 또는 왕춘(王賰)이다. 왕심은 1259년 할아버지인 고종이 사망하자 아버지 원종이 원나라에 인질로 가있었기에 임시로 국정을 맡아 장례를 주관한다. 1260년 6월 부왕인 원종이 귀국하여 왕이 되자, 1261년 왕심은 태자로 책봉된다.
· 즉위 후
1274년 5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원성공주, 장목왕후)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어 원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공고히 한다. 그해 7월 부왕 원종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고려 제25대 국왕 충렬왕이다. 재위기간은 1274년 7월부터 1308년 8월까지 34년 중에 7개월이 빠진 33년 5개월이다. 1298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 동안은 충렬왕이 아들 충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상왕이 되었으나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하여 다시 복위하였기 때문이다. 즉 충렬왕이 몽골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고려를 안정시키려 하자, 그의 아들 충선왕은 아버지 정책에 불만을 품고 권문세족의 부패 척결과 불법 소유한 토지 문제를 해결 등의 개혁정책을 추진한다. 이러한 둘 사이의 정치적인 불화는 나중에 무비 참수와 조비무고사건 등으로 더욱 심화된다.
· 부마가 된 왕들
원나라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원나라의 부마가 된 왕들은 충렬왕(1274~1308) → 충선왕(1298, 1308~1313) → 충숙왕(1313~1330, 1332~1339) → 충혜왕(1330~1332, 1339~1344) → 충목왕(1344~1348) → 충정왕(1349~1351)으로, 이후 공민왕 때부터는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혼인관계를 단절하며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개혁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몽골의 일본 원정
고려 충렬왕 때 1280년 몽골은 고려에 일본 원정을 지원하기 위한 행정기구인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제주도에 군마를 키우는 목마장을 만든다. 2차에 걸친 몽골의 일본 원정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양 원정으로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주도했으며, 고려와 남송의 군대가 동원된다. 일본에서는 이를 "원구(元寇)"라고 부른다. 몽골의 일본 원정이 실패로 끝났으나 정동행성은 계속 유지되다가 1356년(공민왕 5년)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따라 폐지된다.
· 1차 원정(1274년)
1274년 10월 몽골과 고려 연합군은 혼도, 홍다구가 약 4만 명의 병력과 900척의 전함을 동원하여 합포를 출발하여 일본을 공격한다. 고려군은 김방경 장군의 지휘 아래 참여했으며, 쓰시마섬과 잇키섬을 점령한 후 규슈의 하카다에 상륙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과 폭풍(신풍, 카미카제)으로 인해 원정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하게 된다.
· 2차 원정(1281년)
1277년 쿠빌라이 칸은 1차 원정 실패 후 제주도에 목마장을 설치한다. 1281년 쿠빌라이는 혼도, 홍다구에게 5만의 병력, 범문호에게 약 10만 명의 병력을 주고 4,4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2차 원정을 한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력한 방어와 또다시 발생한 폭풍(신풍, 카미카제)으로 인해 원정은 실패로 끝난다. 이후 몽골은 1294년 1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자 더 이상 일본 원정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충렬왕의 치세
· 영토 회복
충렬왕은 원종 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한다. 즉 1290년에 동녕총관부가 요동으로 이동하면서 서북쪽 자비령 이북의 동녕총관부의 땅을, 1301년에는 제주도의 탐라총관부를 원나라로부터 돌려받는다.
· 전민변정도감
충렬왕은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소유한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키기 위한 임시 특별 기구인 전민변정도감을 다시 설치한다. 이 기구는 고려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원종 10년(1269년)에 처음 설치된 이후 충렬왕, 공민왕, 우왕 시기에 여러 차례 재설치되었다.
· 몽고풍 확산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와의 혼인으로 고려 왕실과 몽골 황실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몽골의 관제를 고려에 도입하여 관제를 개편한다. 즉 3성 6부제에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하여 첨의부가 되고, 추밀원은 밀직사, 어사대는 감찰사, 한림원은 문한서로 격하된다. 또한 충렬왕은 몽골식 풍습과 의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고려에 확산시킨다. 몽골의 일본 원정에 정동행성의 승상직을 맡아 준비한다.
· 공녀 징발
원종 때부터 시작된 원의 공녀 징발이 점점 많아져 1275년 10월 전국 처녀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조치가 취해져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진다. 고려 왕실의 족내혼이 풍습이 사라지고 원의 황실과 통혼을 하게 되어 부마국이 된다.
사망과 가족
· 사망
충렬왕은 여색과 가무를 좋아하여 정사에 소홀히 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싼다.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역대 고려 왕 중에 최장수한 왕이다. 그의 능은 경릉(慶陵)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현재의 개성) 지역에 위치해 있다
· 가족
충렬왕은 원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1비 장목왕후(제국대장공주), 제2비 정화원비 왕씨, 제3비 숙창원비 김씨와 후궁인 시비 반주, 시무비 시씨, 후궁 김씨 등 6명의 부인에게서 4남 2녀를 얻는다. 즉 장목왕후에게서 2남(왕장 충선왕, 미상), 시비 반주에게서 1남(왕서), 정신부주 왕씨에게서 1남(강양공 왕자)과 2녀(정녕원비, 명순원비)를 낳는다. 충렬왕은 어린 시절 왕인의 딸 정화궁주 왕씨를 태자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원의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과 결혼한 후 자신이 제1비가 되고 정화궁주를 제2비로 물러나게 하며, 그녀를 감금하여 충렬왕과 만나지 못하게 하고, 정사에 관여하는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에 반발한 충렬왕은 무력감을 느껴 궁인 무비를 총애하며 사냥과 주색잡기에 빠지게 된다. 애만 태우던 제국대장공주는 1297년 5월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주요 인물
· 삼국유사 일연(1206 ~ 1289)
일연(一然)은 고려 충렬왕 시기의 대표적인 승려이자 학자로,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전견명이다.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 승려로 출가한 후, 1227년 승과에 급제한다. 일연은 충렬왕의 명을 받고 1277년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에 머무르면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 삼국유사를 집필한다. 삼국유사에는 고조선부터 삼국 시대,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와 신화, 전설, 민간 이야기 등이 담겨 있으며 특히 '단군신화'가 최초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운문사와 인각사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대장경 제작에 참여하는 등 불교의 발전에 기여한다. 충렬왕은 일연을 국존으로 추대하며 그의 학문과 덕망을 높이 평가했다.
· 동방의 주자 안향(1243 ~ 1306)
안향은 경북 흥주(영주)에서 태어난 고려 후기의 문신, 학자, 교육자로서 성리학을 최초로 고려에 도입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126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한다. 삼별초의 난 당시 강화도에 체포되었으나 개경으로 탈출하여 왕의 신임을 받는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주자학을 고려에 전파하였으며, 그는 섬학전을 설치하여 교육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고, 국자감 대성전을 건립하여 학문 진흥에 기여한다. 안향은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아 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그의 제자로는 이색, 정몽주, 길재, 이존오, 정도전 등이 있다.
· 대쪽 같은 선비 이조년(1269 ~ 1343)
이조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 학자, 시인으로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매운당이다. 그는 129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충렬왕, 충숙왕, 충혜왕을 섬기며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특히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었을 때 단신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그의 무죄를 강변하며 귀국을 도운다. 이조년은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그의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는 오늘날에도 유명하다. 그의 대쪽 같은 성격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하였다. 충혜왕이 궁을 나와 송강에서 새 사냥에 빠지자 그 앞에 무릎을 굻고 그만두기를 강권한다. 왕이 말을 듣지 않자 고향으로 들어가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다.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충혜왕의 사당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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