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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사

제24대 원종 - 출생과 즉위 및 무신정권의 종식, 삼별초의 항쟁, 사망과 가족

by 이야기마을촌장 2025. 3. 29.

고려 제24대 국왕 원종(宗, 1219 ~ 1274)은 고종과 안혜왕후 유씨의 장남으로 이름은 ()이다. 즉위기간은 1260년 6월부터 1274년 7월까지 14년 1개월이다. 그러나 1269년 6월부터 1269년 12월까지 5개월간은 무신 임연이 원종을 폐하여 동생 안경공 왕창이 왕이 되었으나 원 쿠빌라이의 간섭으로 다시 원종이 복귀한다. 원종은 태자 때 몽고에 인질이 되었으나 원의 황제 계승 싸움에 쿠빌라이를 지지한다. 부왕 고종이 사망하자 후에 황제가 되는 쿠빌라이의 지원으로 고려왕에 오른다. 몽골과의 전쟁을 끝내고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태자 왕심(충렬왕)을 원의 공주와 혼인시켜 부마국이 된다.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며,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내부의 혼란을 정리한다. 이와 같이 원종은 고려의 자주성을 유지하며 고려를 보존하는데 큰 활약을 한 왕 또는 원의 간섭기(원종 →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공민왕)를 연 왕으로도 평가된다. 

원종

 

출생과 즉위

· 출생과 즉위 전

원종(宗, 1219 ~ 1274)은 고종과 안혜왕후 유씨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이름은 처음에 (倎)이었다가 ()으로 개명한다. 왕전은 1235년 왕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259년 나이 40세에 몽고의 항복조건으로 원의 황제를 배알 하러 연경으로 간다. 태자 왕전이 연경으로 떠난 지 얼마 후 고종이 승하한다. 무신의 실권자 김준이 안경공 왕창을 옹립하려 하자, 대신들의 반대로 태손인 왕심이 임시로 왕이 되고 고종의 부음을 원으로 전한다. 

 

· 즉위

한편 황제를 배알 하러 가던 중 태자 왕전은 원의 황제 몽케 칸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때 왕전은 황제 계승 싸움에서 쿠빌라이, 훌라구, 아리크부케 중에 쿠빌라이를 선택하고 지지한다. 쿠빌라이는 오래 동안 항복하지 않던 고려 태자가 자신을 선택하자 크게 기뻐하고 하늘의 뜻이라고 여긴다. 쿠빌라이의 지원으로 다루가치 속리대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한 태자 왕전은 1260년 6월 41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고려 제24대 국왕 원종이다. 그러나 최씨 무인정권을 끝내고 유경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은 김준은 원종의 명을 무시하고 강화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무신정권의 종식

· 쿠빌라이의 등극

1261년 3월 쿠빌라이가 개평부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45세의 나이로 몽고의 새로운 칸이 된다. 그러자 동생 아리크부케도 4월 알탄 강변에서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열고 칸이 된다. 이로 인해 몽고는 두 명이 칸이 양립하여 4년 동안 황제 계승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산동의 군벌 이단의 반란을 진압하고 군사적으로 우월한 쿠빌라이가 승리하여 몽골제국의 황제가 된다(1264년 7월). 그러자 쿠빌라이에 반대하여 킵차크칸국, 일칸국, 차가타이칸국, 오고타이칸국 등이 독립을 선언한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황제 지배체제를 채택하고, '한나라의 법으로 한나라를 통치한다.'라는 불개토풍의 원칙을 확정한다. 1271년 11월 쿠빌라이는 국호를 대원이라고 선포하고,  수도의 이름을 연경에서 중도로 나중에 대도로 바꾼다.

 

· 무신정권의 종식

1258년 김준, 유경이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62년의 최씨 무신정권은 무너지고, 김준이 실권을 잡게 된다. 1264년 9월 원종은 쿠빌라이가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중도로 찾아가 쿠빌라이를 만나 속리대의 거짓보고로 악화된 관계를 개선시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와 일본이 합세하여 원에 대항하려 한다는 고려출신 홍주구, 조이 등의 허위보고로 관계가 다시 악화된다. 1268년 원은 고려에 남송정벌을 위해 무신의 실권자인 김준과 동생 김충이 군대를 직접 이끌고 원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한다. 김준과 김충은 원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지만 원종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원에 다녀온다. 1268년 12월 원종은 삼별초 책임자 임연을 부추겨 김준과 김충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1269년 6월 임연은 야별초를 동원하여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왕창을 보위에 올리고 '원종이 중병에 걸려 동생 안경공 창에게 선위 하였다'라고 원나라에 허위보고를 한다. 원에 있던 태자 왕심은 쿠빌라이에게 사실을 알리고 고려 왕권 회복을 간청한다. 원의 쿠빌리이가 국왕 폐위 사건을 추궁하자 임연은 폐위 5개월 만인 그해 12월에 원종을 다시 복위시킨다. 원의 병부시랑 흑적이 태자 왕심이 원의 공주와 혼인을 약속하였으니 부마의 아버지인 원종에게 극도의 예를 갖춘다. 얼마 후 원종이 안경공 창과 함께 원나라로 출발하자, 이때 겁이 난 임연은 자기 대신 아들 임유간을 보낸다. 1270년 2월 연경에 도착하자 쿠빌라이는 원종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고 임유간을 감옥에 가두고 임연을 원으로 소환한다. 그러자 임연은 야별초와 함께 강화도로 들어가 항전을 준비한다. 한편 쿠빌라이는 서경을 동녕부로 개칭하고 자비령을 고려와의 경계로 삼는다. 원종 일행은 원의 군사 3천 명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한다. 얼마 후 임연은 쿠빌라이와 원종의 밀접한 관계에 심한 압박을 느낀 나머지 등창이 악화되면서 갑자기 사망한다. 아들 임유무가 뒤를 이어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권의 실권자가 되고, 원종의 뜻에 반하여 강화에서 나오지 않는다. 1270년 5월 원종은 송송례, 홍문계에게 명하여 임유무를 암살한다. 이것으로써 100년 동안 왕권보다 더 강력하던 무인정권 시대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1270년 원나라에서 귀국한 원종이 강화도에서 개경 환도를 단행함으로써 원의 간섭기가 시작된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 삼별초의 난

삼별초는 원래 최우가 도둑을 잡기 위한 창설한 야별초가 최우의 사병 조직으로 변질되었다가, 야별초가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어지고,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사람들로 만들어진 '신의군'까지 포함하여 만들어진 특수군대이다. 1270년 원종은 개경으로 환도하자 무신정권의 사병조직인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한다. 이에 삼별초는 몽골과의 강화조약과 개경환도에 반발하여 강화도에서 배중손을 중심으로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최후까지 몽고와의 항쟁에 들어간다. 1271년 진도로 이동하여 저항을 이어가다가 김방경과 혼도, 홍다구 등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승화후 온, 배중손이 전사하자, 삼별초의 남은 세력들은 제주도로 들어가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저항을 이어간다. 1273년 여몽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한 김통정과 70여 명의 부하들은 산으로 들어가 자결함으로써 약 3년에 걸친 대몽항쟁은 완전히 끝이 난다. 이러한 삼별초의 난은 고려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외세에 저항한 항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어서 원나라는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배치한다. 이때부터 제주도는 원의 관할 아래 일본 정벌을 위한 목마장이 설치되고, 죄수들의 귀양지로 사용되게 된다. 

 

 

사망과 가족

· 사망

원종은 즉위 약 14년 만에 1274년 6월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능은 소릉(韶陵)으로 개성시 룡흥동에 소재하고 있다.

 

· 가족

원종은 장익공 김약선의 딸 제1비 정순왕후 김씨와 신안공 왕전의 딸 제2비 경창궁주 유씨 등 2명의 부인에게서 3남 2녀를 얻는다. 즉 정순왕후 김씨에게서 1남(왕심 충렬왕), 경창궁주 유씨에게서 2남(시양후 왕이, 순안공 왕종) 2녀(경안궁주, 함녕궁주)를 낳는다. 경창궁주 유씨는 원종이 맏아들 왕심을 태자로 봉하려 하자 반대하고 자신의 소생인 순안공 왕종을 내세운다. 그 일로 인해 충렬왕의 미움을 받다가 1277년 순안공을 위한 기도를 충렬왕을 해하는 저주의식을 했다는 모함을 받고 궁궐에서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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