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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사

제27대 충숙왕 - 출생과 즉위, 원의 간섭과 내정의 혼란, 치세, 가족과 사망

by 이야기마을촌장 2025. 4. 4.

고려 제27대 국왕 충숙왕(忠肅王, 1294 ~ 1339)은 충선왕과 의비 예쉬진의 차남으로 이름은 강릉대군 도(燾)이다. 재위기간은 1313년 ~ 1330년, 1332년 ~ 1339년으로 두 차례에 걸쳐 24년 동안 즉위한다. 충숙왕은 권세가들이 불법으로 차지한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찰리변위도감을 설치하고, 사심관제도를 폐지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원으로부터 무리한 세공을 삭감하고, 공녀와 내시의 수를 조정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하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충숙왕은  원의 내정간섭과 심양왕 고와의 갈등 속에서도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개혁을 시도한 왕으로 평가된다.

충숙왕

 

출생과 즉위

· 출생

충숙왕(忠肅王, 1294 ~ 1339)은 충선왕과 의비 예쉬진 사이의 차남으로 이름은 강릉대군 도(燾)이다. 1294년 5세 때 강릉대군을 책봉된다.

 

· 즉위

부왕 충선왕은 심양왕과 동시에 고려 왕이 됨으로써 한반도와 요동을 동시에 통치한다. 충선왕은 의비의 소생인 첫째 아들 왕감을 고려 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자 1310년 광릉군 왕감을 처형한다. 1313년 3월 고려 중신들의 귀국 종용과 원의 압력에 시달리던 충선왕은 갑자기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에게 고려 왕위를 물려준다. 그가 바로 고려 제27대 국왕 충숙왕이다. 20세의 왕도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되니, 부왕 충선왕이 상왕이 되어 고려 인사권과 재정을 쥐고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한다. 1316년 충선왕은 심양왕의 자리를 조카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주는 동시에 고려 세자로 책봉한다. 이는 장차 왕위 분쟁을 초래하게 된다. 충숙왕은 원공주의 소생이 아니며 차남으로 즉위하여 정통성이 없었으므로, 허약한 왕권을 지키기 위해 3명의 원나라 공주(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경화공주)와 정략결혼을 하여 부마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원의 간섭과 내정의 혼란

· 복국장공주의 죽음

충숙왕은 1313년 8월 홍규의 딸 공원왕후 홍씨를 비로 맞아들인다. 그 무렵 충선왕으로부터 심양왕이 된 세자 왕고가 세력을 확대하자 충숙왕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이에 충숙왕은 원의 배경을 갖기 위해 영왕 에센티무르의 딸 복국장공주와 혼인을 하여 원 황실의 부마가 된다. 그러나 투기가 심하고 깔끔하지 못한 복국장공주가 총애하던 공원왕후 홍씨를 대궐에서 쫓아내자, 충숙왕은 그녀와 자주 다투며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1318년 5월 복국장공주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원에서는 사인에 의혹을 품고 조사관을 보낸다. 이에 의심을 받던 충숙왕은 마음이 불안해져 주색과 기생에 빠져 든다.

 

· 고려왕과 심왕의 대립

1321년에 권한공, 채홍철, 채하중, 조적 등이 원의 황제 영종의 후원을 받는 심왕 고를 고려왕으로 세우려고 한다. 이때 고려의 왕권을 노리던 심왕 고의 고변(충숙왕이 주색과 사냥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을 듣고 원의 영종은 충숙왕의 국왕인을 빼앗고 3년 동안 원에 억류한다.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반란으로 영종이 즉위 43일 만에 살해되고 태정제가 즉위하자 심왕옹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에 원나라에서는 13년 동안 7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복잡한 권력 다툼으로 문종(투그 테무르), 명종(쿠살라), 그리고 순제(토곤 테무르)가 차례로 황제로 즉위한다. 순제는 미모의 고려인 궁녀 기씨를 좋아하여 황후로 책봉하려고 하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한편 심왕 왕고와의 알력이 계속되고 원나라에 소환되어 고초를 당한 충숙왕은 정사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1330년 아들 왕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건너간다. 그가 바로 고려 역사에서 최악의 폭군충혜왕이다. 충혜왕의 패륜을 보다 못한 원나라는 2년 만인 1332년에 충혜왕을 폐위시키고, 다시 충숙왕을 복위시킨다. 정치에 복귀한 충숙왕은 1333년 3월 원나라의 경화공주와 함께 귀국하니, 이제는 더 이상 심양왕 고의 상대가 아니었다.  1339년에 충숙왕이 죽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다시 심왕 고와 충혜왕이 대립하게 된다. 이때에는 조적 등이 원의 태사 백안의 후원을 받으면서 충혜왕과 무력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나 충혜왕이 승리하였지만 잔당들의 참소로 충혜왕은 폐위된 후 원으로 잡혀가 귀양지에서 의문사한다. 1345년에 심왕 고가 죽자 심양왕은 공석이었다. 1354년(공민왕 3)에 독타불화가 심왕에 봉해진 이후로는 심왕이 고려 왕위를 엿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충숙왕의 치세

· 공녀와 내시 선발 

귀국 후 왕권이 강해진 충숙왕은 원나라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세공을 삭감하고 공녀와 내시의 수를 조정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 찰리변위도감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들이 막대한 농장을 통해 경제적인 기반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농장은 전시과와 달리 면세, 면역의 특권을 누려 그 폐해가 심각하였다. 이에 충숙왕은 특히 찰리변위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차지한 땅과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다. 이는 권문세족들이 부당하게 확장한 농장을 혁파하고 토지제도를 정상화하기 위한 개혁적 시도이다.

 

 

가족과 사망

· 가족

충숙왕은 제1비 복국장공주, 제2비 조국장공주, 제3비 경화공주인 세 명의 원나라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원 공주가 연달아 사망하자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충숙왕은 계속 새로운 혼인대상을 물색하며 원 부마의 지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고려 여성인 제4비 공원왕후(명덕태후) 홍씨와 제5비 수비 권씨5명의 부인에게서 3남을 낳는다. 즉 조국장공주에게서 1남(차남 용산원자)과 공원왕후에게서 2남(장남 충혜왕, 3남 공민왕)을 얻는다.

 

· 사망

아버지와 사촌형제에 이어 아들과도 권력다툼을 하여야 했던 충숙왕은 복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사에 흥미를 잃고 은둔생활에 빠진다. 결국 충숙왕은 신하도 만나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로 소일하다가 8년 만에 1339년 3월 향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능은 의릉(毅陵)으로 현재 개성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이후 왕들의 죽음

충숙왕 뒤를 이은 충혜왕은 원나라에 의해 폐위당하고 귀양 가서 의문사했고, 충목왕은 즉위한 지 겨우 4년 만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다. 충정왕도 즉위한 지 3년 만에 14세의 나이로 폐위되어 유배지 강화도에서 독살당하고, 공민왕 역시 자제위에 암살당한다. 고려 말의 우왕, 창왕, 공양왕도 이성계에 의해 줄줄이 처형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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