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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사

제31대 공민왕 1 - 출생과 즉위, 반원 자주 개혁 정책, 외적의 침입, 유인우

by 이야기마을촌장 2025. 4. 7.

고려 제31대 국왕 공민왕(恭愍王, 1330 ~ 1374)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차남으로 이름은 강릉대군 왕기(王祺)이다. 1351년 10월에 즉위하여 1374년 9월에 시해되기까지 23년간 재위한다. 공민왕의 재위 기간은 원나라 간섭을 받는 가운데 중국은 원명 교체의 시기이며, 국내적으로는 왜구의 침략과 홍건적 침입으로 토지가 황폐되고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여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사망하자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개혁 정치를 추진한다. 그러나 공민왕은 신돈마저 처형되자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술과 향락에 빠져 그의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공민왕

 

출생과 즉위

· 출생과 어린 시절

공민왕(恭愍王, 1330 ~ 1374)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 사이에 태어난 차남으로 이름은 처음에 기(祺)로 즉위 후에는  전(顓)으로 개명한다. 왕기는 1341년부터 1351년까지 약 10년 동안 원나라에서 독로화(禿魯花)로 숙위생활을 한다. 1344년 강릉부원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349년에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든든한 배경을 마련한다.

 

· 즉위

1350년 경상도 지역에 왜구가 창궐하고 원에서 홍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원의 순제와 기황후는 어린 충정왕 대신 숙부인 강릉대군 왕기를 선택하여 고려의 내정을 안정시키려고 결심한다. 그 결과 1351년 10월 충정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고 21세인 강릉대군 왕기를 왕으로 책봉한다. 그가 바로 고려 제31대 국왕 공민왕이다. 1351년 10월에 즉위하여 1374년 9월에 시해되기까지 23년간 재위한다.

 

 

반원 자주 개혁정책

중국대륙이 원명교체기로 혼란해지자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감한 반원 자주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한다. 기철 등의 친원파를 제거하고, 원의 풍습, 연호, 관제를 폐지한다. 정동행성을 철폐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여 영토를 회복한다. 1369년 이인임,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를 정벌하고, 권문세가의 도구가 된 정방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한다. 이러한 개혁정치에 적극 지지하던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사망하자,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고 전민변정도감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다. 성균관을 정비하고 유학 교육을 장려하여 인재 양성에 힘쓴다. 

 

· 조일신의 난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친원파 권문세족 조일신 등이 1352년 9월 정변을 일으켜 공민왕을 협박하여 스스로 우정승이 되고, 일당들은 요직을 차지한다. 이에 공민왕은 정동행성 회의에서 김첨수를 시켜 조일신 연행하고 그 일당 정을보 등 28명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 원나라 파병

홍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공민왕은 원의 지원 요청에 따라 1354년 7월 최영, 이방실, 김용 등이 이끄는 병력 2천을 파병을 보낸다. 이들은 귀국하여 공민왕에게 원나라가 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세히 보고한다. 이에 공민왕은 반원 자주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 병신 정변(기철 일당 소탕)

기자오의 딸이 공녀로 끌려갔다가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되자 친정오빠인 기철 등이 권세를 부려 패악을 저지른다. 1356년 4월 공민왕은 원의 대신들을 위한 연회를 베푼다고 속여 기철 일당을 대궐로 불러들인다. 공민왕의 계책을 전혀 모르고 있던 기철과 권겸은 대궐 안에 들어가자마자 철퇴에 맞아 죽고, 노책은 집에서 체포되어 죽임을 당한다. 이어서 그들의 아들인 기유걸, 노제, 권상화 등이 줄줄이 처형되면서 친원 세력은 일망타진된다.

 

· 쌍성총관부 회복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동북면병마사 유인우에게 명하여 원나라로 투항한 조휘와 탁청 이래로 그 후손들에 의해 약 99년간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한반도 철령 이북의 땅을 회복한다. 이때 조휘의 손자 조돈과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이 내부에서 협력하여 성문을 열었고, 고려군은 이를 통해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킨다. 이어서 공민왕은 서북면병마사 인당에게 명령하여 압록강 너머 원의 8참을 공격하여 격파하는 고려 최초의 요동정벌을 한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와 관제를 없애고 대신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원래의 관직 명칭으로 되돌려놓는다. 그 후 1362년 쌍성총관부의 남은 잔당 조소생과 몽골의 군벌 나하추가 동북면으로 침공한다. 이때 나하추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대패하고 도망가 화친을 요청한다. 이 사건으로 쌍성총관부의 잔당인 조소생, 탁도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한다. 

 

 

외적의 침입

· 왜구의 침입

1350년 이후 왜구들이 본격적으로 출몰하여 남해안에서 경기도 연안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노략질을 하며, 심지어 조운선까지 약탈한다. 1358년 최영의 400여 척의 함대가 오예포로 침략한 왜구들을 물리친다. 홍건적의 2차 침입을 막은 후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왜구에 대비한다.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한 왜구 3천 명을 격파한다. 공민왕은 최영을 왜구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왜구 퇴치를 하는 한편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유화책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공민왕 치세 내내 왜구의 약탈을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한다.

 

· 홍건적의 침입

홍건적은 몽고에 반대하는 한족 백련교도로 구성된 농민 반란군으로 2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다. 1차 침입(1359년 12월 ~ 1360년 2월) : 홍건적 장수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고려 서북 지역을 침공하였다. 모거경은 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안우, 이방실,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해 퇴각한다. 2차 침입(1361년 11월 ~ 1362년 1월) : 원나라의 정벌군에게 쫓긴 반성, 파두반 등이 이끄는 홍건적 20만 명이 다시 고려를 침입하여,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킨다. 그러나 공민왕과 도원수 안우, 원수 이방실이 지휘하고, 최영, 이성계 장군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살아 남은 10만 명의 홍건적은 압록강 너머로 패주 한다. 그러나 홍건적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하고 돌아온 3원수인 안우, 이방실, 정세운에게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용이 총병관 정세운을 척살하라는 왕의 밀지를 전한다. 결국 홍건적을 대파한 지 4일 만에 안우와 이방실은 어명에 따라 주연을 마련하고 정세운을 살해한다. 그후 공민왕은 안우가 행궁으로 들어오자 격살하고, 이방실마저 용궁현(예천)에서 정지상 등에 명해 목을 베어 죽인다.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는 그들이 임금을 능멸하였다고 공표하였으나, 사실은 잦은 전란으로 인해 왕권이 위태롭다고 느낀 공민왕이 측근 김용 등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장수들을 제거하는 비정한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일은 나중에 김용에 의한 흥왕사의 변으로 이어진다.

 

· 여진과 몽골의 침입

몽골의 침입 : 1362년 2월, 7월 요동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원의 나하추는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넘어 고려 북방 지역을 침공한다. 이에 공민왕은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대응하자, 나하추는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퇴각한다. 그후 1364년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영변)를 침입하였으나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하고 도망간다. 여진의 침입 : 1364년 1월,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 김삼개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이성계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여 물러간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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