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28대 국왕 충혜왕은 충숙왕의 아들로 이름은 왕정이며, 두 차례(1330~ 1332, 1339~1344)에 걸쳐 왕이 된다. 그는 초기에는 원에 의존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으나, 사치와 향락에 빠져 원나라에 의해 폐위당하고 유배 중에 의문사한다. 충혜왕은 심지어 부왕의 비를 강간하는 패륜을 저지르는 고려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고려 제29대 국왕 충목왕은 충혜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왕흔이며, 재위기간은 1344 ~ 1348년으로 4년이다. 충숙왕이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재위기간 내내 어머니 덕녕공주가 섭정을 한다. 권문세족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돌려주고, 빈민 구제를 위한 진제도감을 설치하는 등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즉위 4년 만에 12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큰 성과는 없었다. 고려 제30대 국왕 충정왕은 충혜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경창부원군 왕저(王胝)이며, 재위기간은 1349 ~ 1351년으로 3년이다. 이복형인 충목왕이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자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다. 어머니 희비 윤씨와 외척들의 전횡과 왜구의 침입으로 혼란한 시기를 겪는다. 원나라에서는 충정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폐위하고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고 숙부인 강릉대군(공민왕)을 왕으로 책봉한다. 1352년 13세의 충정왕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독살된다.

충혜왕의 생애
· 출생과 즉위
충혜왕(忠惠王, 1315 ~ 1344)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명덕태후)의 아들로 이름은 왕정(王禎)이다. 그는 두 차례(1330~ 1332, 1339~1344)에 걸쳐 왕이 된다. 1330년, 충숙왕이 폐위되자 그의 아들 왕정이 즉위한다. 그가 바로 고려 제28대 국왕 충혜왕이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2년 만인 1332년 원에 의해 폐위되고 다시 충숙왕이 복위되자 충혜왕은 폐위되고 원나라로 들어간다. 그 후 7년이 지난 1339년 아버지 충숙왕이 사망하자 다시 왕이 된다.
· 생애
1339년 충숙왕이 사망한 후 즉위한 충혜왕은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 사냥에 빠진다. 5월에 부왕의 후비 수비 권씨를, 8월에 부왕의 후비인 경화공주를 강간한다. 그 외에도 충혜왕은 신하들의 아내, 장인의 후처 황씨, 외숙 홍융의 처까지 강간하는 등 패륜을 일삼는다. 수치심에 못이긴 수비 권씨는 이듬해 자살하고, 분개한 경화 공주는 심양왕의 측근인 조적에게 사건을 털어 놓는다. 충숙왕의 사촌동생 심양왕 왕고를 옹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조적 등이 원의 태사 백안의 후원을 받으면서 군사 100여 명으로 충혜왕을 습격한 심왕옹립운동 일어난다. 그러나 충혜왕의 반격에 조적은 사망하고 심왕 왕고는 연경으로 도망가 충혜왕의 경화공주 강간 사건을 고발한다. 그 결과 연의 승상 바얀은 충혜왕과 조적의 난에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잡아 원으로 압송한다. 그 후 고려의 여인들의 입김으로 승상 바얀이 축출되고 사망한다. 황제 순제는 총애하던 고려 궁녀 기씨를 제2황후로 봉하니 그녀가 바로 제1황후 바얀후투그를 누르고 원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기황후이다. 1340년 4월 충혜왕은 당당하게 귀국하여 시장에 개입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고 응방을 강화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충혜왕은 다시 여인들을 강간하고 여색에 빠진다. 충혜왕은 기철의 동생 기륜의 인척인 내시 전자유의 부인 이씨를 강간한 사건으로 기황후의 분노를 산다.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불구하고 삼현에 새로 궁궐을 짓고, 강간과 음행을 한다. 또 사무역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는 등 많은 실정을 저지른다. 기황후의 친정 오빠 기철의 상소로 황제 순제는 충혜왕을 포박하여 연경으로 압송한다.
· 사망
충혜왕은 결국 폐위당하고 원나라로 끌려가 게양현으로 유배 가던 도중 1344년 1월 30세의 나이로 악양현에서 의문사한다. 그의 능은 영릉(永陵)으로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후세 사람들은 충혜왕을 주색을 좋아하고 패륜을 일삼는 고려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평가하고 있다.
· 가족
충혜왕은 왕비로 원나라의 관서왕 초팔의 장녀인 제1비 덕녕공주, 제2비 희비 윤씨 그리고 후궁으로 화비 홍씨, 은천옹주 임씨 등 4명의 부인에게서 3남 1녀를 가진다. 즉 덕녕공주에게서 1남( 왕흔 충목왕) 1녀(장녕공주), 희비 윤씨에게서 1남(왕저 충정왕), 은천옹주 임씨에게서 1남(왕석기)을 낳는다.

충목왕의 생애
· 출생과 즉위
충목왕(忠穆王, 1337 ~ 1348)은 충혜왕과 덕녕공주의 장남으로 이름은 왕흔(王昕)이다. 그는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어릴 때부터 원에서 생활하였다. 1344년 아버지 충혜왕이 유배 중에 사망하자 8세의 나이로 왕이 된다. 그가 바로 고려 제29대 국왕 충목왕으로 재위기간은 1344년부터 1348년까지 4년이다.
· 치세
충목왕이 어린 나이로 왕이 되자 재위기간 내내 어머니 덕녕공주가 섭정을 한다. 1345년 폐정을 개혁하는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이제현을 중용하여 정방을 혁파하고 녹과전을 복구하여 권문세족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돌려주는 개혁 조치를 하였으나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불법으로 남의 토지를 강탈한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만이 장형으로 옥에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 기삼만의 부인이 정동행성에 고발하여 원의 사신이 파견되어 정치도감의 정치관들을 조사 처벌한다. 1348년 서해도와 양광도에 빈민 구제를 위한 진제도감을 설치한다.
· 사망과 가족
충목왕은 어머니의 섭정 속에서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착실히 쌓아갔으나, 안타깝게도 즉위 4년 만인 1348년 12월, 12세의 어린 나이로 병에 걸려 요절한다. 따라서 충목왕의 부인과 자식은 없다. 당시 유럽에는 흑사병이 창궐하였으며 충목왕도 흑사병에 걸렸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 그의 능은 명릉(明陵)으로 개성시 개풍군 연릉리에 소재하고 있다.

충정왕의 생애
· 출생과 즉위
충정왕(忠定王, 1338 ~ 1352)은 충혜왕과 희비 윤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경창부원군 왕저(王胝)이다. 재위기간은 1349년 7월 ~ 1351년 10월으로 2년 3개월이다. 충목왕이 후사도 없이 갑자기 병으로 요절하자, 왕위 계승 대상자 중에는 충혜왕의 동생인 19세의 강릉대군 왕기와 충혜왕의 아들인 11세의 경창부원군 왕저가 있었다. 1349년 7월 원나라 황제 순제는 둘 중에 조종하기 쉬운 왕저를 책봉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30대 국왕 충정왕이다.
· 치세
충정왕이 어린 나이로 왕이 되자, 어머니 희비 윤씨와 외할아버지 윤계종 등의 외척세력과 선왕 충목왕의 어머니 덕녕공주의 외척세력 간의 권력 쟁취가 벌어진다. 충정왕의 재위기간 내내 이러한 외척 세력들과 기철 가문 사이의 권력다툼으로 혼란한 시기를 겪는다. 충목왕의 어머니 덕녕공주가 원으로 돌아가자, 권력은 희비의 외척들과 기황후의 친정오빠인 기철 일가들이 차지하게 된다. 1350년에는 경상도 지역에 왜구의 습격이 본격화되어 많은 피해를 입는다. 한편 원에서는 백련교도인 홍건적의 난이 발생한다. 이승로, 윤택 등이 충정왕이 나이가 어려 국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투서를 보내온다. 그러자 원의 순제와 기황후는 고려의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1351년 10월 충정왕을 폐위하고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고 숙부인 강릉대군 왕기(공민왕)를 왕으로 책봉한다.
· 사망
어머니 희비 윤씨와 떨어져 유배지 강화도에서 눈물로 보내던 충정왕은 1352년 14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독살된다. 그의 능은 총릉(聰陵)으로 현재 개성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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