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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20대 경종실록 - 비운의 왕 경종의 등극 및 신임사화와 경종의 가족들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14.

조선의 제20대 국왕 경종(1668 ~ 1724)의 이름은 이윤(李)으로 숙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희빈 장씨로 영조의 이복형이다. <경종실록>는 총 15권 7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720년 6월부터 1724년 8월까지 4년 2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726년 8월에 시작하여 1732년 2월에 완성한다. 편찬에는 좌의정 이집, 우의정 조문명을 총재관으로 하고, 대제학 이덕수, 서명균, 이의현, 기재로 등이 도청당상이 되어 진행되었다. 실록의 내용은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신임사화가 대부분을 이룬다. 이후 정조 때 실록의 신임사화 부분을 무옥으로 단정하고 수정, 삭제하여 <경종수정실록>을 편찬한다. 수정실록 편찬작업에 총재관 정존겸을 비롯하여 23명이 참여한다. 

경종

 

비운의 왕 경종의 등극

· 경종의 어린 시절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지만 정실의 소생이 아닌 희빈 장씨의 소생으로 태어난 지 2달 만에 원자로 정해진다. 3살 때 '기사환국'으로 세자에 책봉되고, 어머니 희빈 장씨도 왕비에 책봉된다. 그 후 '갑술환국'으로 어머니 장씨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1701년 세자 윤이 14살 때 '무고의 옥'으로 어머니 희빈 장씨가 아버지 숙종의 손에 사사된다. 어머니 장희빈이 죽은 후 숙종은 경종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수시로 "누굴 닮아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라고 비난하며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세자 윤(경종)은 이러한 사건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소 겪고 충격을 받아 줄곧 병에 시달리며 자식도 얻지 못한다. 야사에서는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하여 숙종은 세자 윤을 장씨에게 보여준다. 그러자 희빈 장씨는 갑자기 달려들어 세자 윤의 중요 부위를 세게 잡아당긴다. 그러자 세자 윤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위의 상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세요. 제19대 숙종실록 1 - 숙종의 환국정치와 왕권강화 및 노론과 소론의 탄생

 

제19대 숙종실록 1 - 숙종의 환국정치와 왕권강화 및 노론과 소론의 탄생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 ~ 1720)의 이름은 이순(李焞)으로 현종의 외동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왕후 김씨이다. 는 총 65권 73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674년 8월부터 1720년 6월까지 45년 10

bong3614.tistory.com

 

· 연잉군의 세자대리청정

숙종은 1716년 병신처분으로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중용한 후, 1717년 세자 윤이 병약하고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노론의 영수 이이명을 독대하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으로 후사를 정할 것을 부탁한다(정유독대). 그리고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자 윤을 대신하여 편전에 참석하여 정사를 배우는 것인 '세자대리청정'을 명한다. 이때부터 세자 윤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당쟁이 격화하게 된다.  

 

· 경종의 등극

1720년 숙종이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 윤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조선 20대 국왕 경종이다. 이때 그의 나이 33세이다. 

 

 

경종의 치세와 신임사화

· 경종의 치세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노론은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건저(세자를 책봉하는 일)를 주장한다. 그에 따라 경종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한다. 두 달 뒤 노론은 다시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는 경종이 완전히 정사에 손을 떼라는 의미이다. 이에 소론 측은 경종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때 경종은 와병 중이라서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하였다가 거둬들이기를 반복한다. 그 결과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은 더욱 심화된다. 

 

· 신임사화

신임사화는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1721년부터 1722년까지 노론과 소론 간에 벌어지는 당파 싸움이다. 1721년 신축년 12월에 소론 김일경 등 7명은 세제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 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을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로 상소한다. 이로 인해 노론 4대신은 파직되고 유배되어 축출되고,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 최규서, 우의정 최석항이 임명되어 소론이 집권하게 된다. 이 사건을 '신축옥사'라 한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722년 임인년 3월, 남인의 서얼출신 지관인 목호룡은 노론 4대신의 아들 또는 추종자들인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김성행 등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모를 했다고 '삼급수설'(대급수:칼로 살해, 소급수:약으로 살해, 평지수:모해하여 폐출함)을 들어 고변한다. 이로 인해 노론의 4대신들은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사당하고 노론 세력들은 다시 숙청당한다. 사건에 관련되어 죽은 사람이 63명, 유배된 사람이 114명, 자살한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이 사건을 '임인옥사'라 한다. 이 두 사건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축년과 인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 한다. 이때 왕세제 연잉군도 임인옥사에 관여하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연잉군은 자신의 수족 장세상이 쫒겨나고, 경종의 문안도 금지되는 등 많은 고초를 당하게 된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연잉군은 대비 인현황후 김씨를 찾아가 자신의 결백을 호소한다. 대비의 언교로 소론 측은 화를 누그러뜨렸고, 연잉군 이외에는 왕통을 이을 사람이 없어 연잉군은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그 결과 노론은 실권하고 소론이 정권을 잡는다. 

 

· 경종의 평가

경종은 재위 4년 2개월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뚜렷한 치적도 남기지도 못하였다. 경종의 시대는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다툼으로 피바람에 휩싸였던 시기이었다. 이 시기에 독도가 우리 영토이라는 것을 밝힌 남구만의 <약천집>이 간행되었다. 

 

 

경종의 사망과 가족들

· 경종의 사망

경종은 어린 시절부터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과 어머니 희빈 장씨의 죽음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러한 경종은 어렵게 왕위에 올라 재위기간 4년 2개월 동안 병석에서 지내다가 병이 악화되어 슬하에 자식도 없이 1724년 3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능은 의릉으로 현재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소재하고 있다. 

 

· 가족들

경종은 생전에 단의왕후 심씨와 선의왕후 어씨 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 단의왕후 심씨(1686 ~ 1718)

청원부원군 심호의 딸로 1696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에 병으로 사망한다. 그녀는 총명하고 덕이 있어 병약한 세자를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1720년 경종이 왕이 되자 왕후에 추존된다. 그녀의 능은 혜릉으로 경기도 양주시에 있다. 

 

· 선의왕후 어씨(1705 ~ 1730)

영돈녕부사 어유구의 딸로 1718년 세자빈이 되어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된다. 이후 1724년 경종이 사망하자 경순왕대비에 올랐다가 1730년 2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하며 사망한 후 경종과 함께 의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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