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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18대 현종실록 -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 및 현종의 사망과 가족들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12.

조선의 제18대 국왕 현종(1641 ~ 1674)의 이름은 이연(李棩)으로 효종의 첫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선왕후 장씨이다. <현종실록>는 총 22권 23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659년 5월부터 1674년 8월까지 15년 3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675년 5월에 시작하여 중간에 서인의 몰락과 남인의 집권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1677년 9월에 완성한다. 편찬 작업에는 총재관 허적, 권대운을 비롯하여 총 66명이 참여한다. 그 후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현종실록>은 다시 전면 개수작업을 거쳐 3년 만인 1683년에 <개수현종실록>이 완성된다. 

현종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

· 평화로운 현종시대

현종시대는 밖으로는 외침이 일절 없었으며 안으로는 사회가 안정을 찾아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치는 예송논쟁으로 인한 치열한 정쟁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정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세력과 인조의 중립정책으로 기용된 남인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처음 인조, 효종대에서는 기호학파 주기론의 서인과 영남학파 주리론의 남인 사이의 학문적인 대립이었으나 현종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정쟁으로 확대된다. 당시 왕가에서는 성종 때 완성된 <오례의>에 따라 관혼상제의 예가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효종과 자의대비와 같은 사례는 없었다. 효종은 인조의 차남이고 장남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효종이 사망하자 몇년 상을 하여야 하는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 1659년)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는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대비가 되고, 1659년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다시 대왕대비인 자의대비가 된다. 효종이 사망하자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서인 송시열, 송준길 등은 1년인 기년설을 주장하고, 다음 해 남인 허목, 윤휴 등은 대왕대비는 3년을 착용해야 한다고 서인을 공격한다. 이에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다시 효종이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이므로 1년을 주장함에 반해, 남인 윤휴, 허적, 윤선도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맏아들과 다름이 없으니 3년을 주장한다. 결국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1년인 기년설이 받아들여 자의대비는 1년 동안 상복을 입게 된다. 남인 윤선도는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이 복상문제를 기회로 역모를 도모한다고 몰아세운다. 그러자 윤선도의 논리는 서인을 모함하는 것이라고 하여 윤선도는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된다. 1666년 현종은 기년상을 확정 짓고 더 이상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포고문을 내린다. 그 결과 서인이 정권을 잡고 남인은 몰락한다. 

 

·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 1674년)

그 후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자 또다시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남인은 그녀가 둘째 며느리지만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며느리나 다름없다며 1년인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9개월인 대공설을 주장한다. 이때 현종은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들여, 자의대비는 1년 동안 상복을 입는다. 1674년 8월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송논쟁을 거론하여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한다. 그러자 숙종은 부왕 현종의 뜻을 따라 다시 예송 논쟁을 일으킨 송시열을 탄핵하여 유배시킨다. 그 후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허적, 윤휴 등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러한 현종 때 벌어진 두 차례의 예송논쟁은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간에 벌어진 성리학 이념 논쟁이다. 이는 단순한 상복 착용 기간을 둘러싼 논쟁을 넘어 서인과 남인 간의 정치적 대립과 권력 투쟁으로 그 결과 조선 후기의 정치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숙종대인 1680년, 김석주는 이번에는 서인과 협력하여 허적, 윤휴 등 남인 세력을 역모로 모는 경신대출척을 일으키고, 그 결과 서인세력이 정권을 잡게 된다. 다시 집권한 서인세력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현종실록>이 전면 개수되는 일이 일어난다. 아무튼 현종은 재위 기간 15년 동안 예송논쟁에 휘말렸지만 비교적 안정된 정치를 펼쳐나간다.

 

· 현종의 치세

현종은 군사적인 면에서 아버지 효종이 추진하였던 이름뿐인 북벌계획을 중단하고, 군비강화에 힘써 1669년 훈련별대를 창설한다. 민간 경제 안정을 위하여 광해군 이후 실시하던 대동법을 호남지방 전역에 실시한다. 또한 문화적인 면에서 정족산성에 새로운 사고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하고, 교서관에서 10여 만 개의 동철활자를 주조하여 인쇄사업을 육성시켰다. 또한 동성통혼을 금지시켰으며, 정실이 개입되는 요인을 없애기 위해 상피법을 제정한다. 현종대에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등 8명의 네덜란드 인들이 14년 동안 억류생활에서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하멜표류기>를 발간하여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게 된다. 

 

 

현종의 사망과 가족들

· 현종의 사망

현종은 서인과 남인 간의 극단적인 예송논쟁에 시달리다가 1674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능은 숭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소재하고 있다. 

 

· 가족들

현종은 명성왕후 김씨만 부인으로 두었으며 둘 사이에 자식은 1남 3녀(숙종, 명선, 명혜, 명안공주)가 있다.

 

· 명성왕후 김씨(1642 ~ 1683)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로 1651년 10세의 나이로 현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된다. 이후 1659년 현종이 왕이 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숙종이 왕으로 즉위하자 공공연히 조정에 간섭하여 비판을 받는다. 특히 1675년 숙종 1년, 숙종의 외조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종친인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녀들과 간통하였다'라고 고발한 사건인 '홍수의 변(紅袖之變)' 때 조정 대신들 앞에 나와 울부짖기도 하는 불미스러운 일을 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남인과 서인의 당쟁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명성왕후 김씨가 궁녀들의 간통을 고발하고 증언하여 왕손들을 처벌하게 한 일로 인해 조정에 대한 간섭으로 인식되었다. 그녀는 1683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능은 숭릉으로 현종과 함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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