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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16대 인조실록 3 - 인조의 끝없는 수난 :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10.

조선의 제16대 국왕 인조(1595 ~ 1649)의 이름은 이종(李倧)으로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원종)의 장남인 능양군이며, 어머니는 인헌왕후 구씨이다. 인조실록는 총 50권 50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623년 3월부터 1649년 5월까지 26년 2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650년 8월에 시작하여 1653년 6월에 완성한다. 편찬 작업에는 총재관 이경여, 김육을 비롯하여 총 66명이 참여한다. 여기에서는 인조의 끝없는 수난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남한산성

 

인조의 끝없는 수난

· 이괄의 난(1624년)
이괄은 인조반정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2등 공신으로 책봉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면서 불만을 품게 된다. 1624년(인조 2년) 1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등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꾸몄다'라는 무고를 한다. 진상을 조사하여 무고임에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김류, 김자점 등의 집권세력들이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한명련을 압송하여 국문하려 한다. 이에 분노한 이괄은 아들을 압송하려 온 금부도사를 죽이고 압송되던 한명련을 구출하고, 반란을 일으켜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변을 출발하여 한양으로 진격한다. 이괄의 부대는 출병 19일 만에 별다른 저항 없이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한다. 그러자 인조는 즉위 1년도 못되어 한성을 버리고 공주로 피난한다. 이후 이괄의 군사는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여, 결국 이천에서 이괄의 부하들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고 관군에게 투항함으로써 반란은 끝이 나게 된다. 이괄의 난은 조선 역사상 내부 반란으로 왕이 도성을 떠나 피난한 최초의 사건으로, 북방을 지키는 주력부대를 끌고 내려와 변방의 수비가 허술하게 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는 등 국내외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정묘호란(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은 1627년에 후금(청나라)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친명(親明) 정책과 후금의 주전(主戰) 정책이 충돌하면서 발생한다. 광해군 시절에 조선은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펼쳐 후금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전쟁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집권하면서 친명사대주의 정책을 펼쳐 후금을 자극하게 된다. 특히, 이괄의 난 이후 이괄의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의 약점을 알리며 후금을 자극한다. 후금이 조선을 지배를 하는 것을 인정하라는 요구에 조선이 거부하자, 1627년(인조 5년) 1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후금은 아민과 지르갈랑이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한다. 후금의 군사가 의주, 정주, 안주 등을 점령하며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 조정은 김상용을 한성을 지키도록 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에 배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조선 의병의 격렬한 저항으로 후방이 염려된 후금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평산에 머무면서 화의를 제의한다. 이때 후금은 세 가지 요구사항(1. 만주를 후금의 영토로 내놓을 것, 2.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3. 명나라를 토벌하는데 3만의 군사를 보낼 것)을 주장한다. 이에 조선은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자와 반대하는 척화론자로 나누어져 논쟁을 펼친다. 최명길 등 주화론자들이 1. 후금군이 평산을 넘지 않을 것, 2. 맹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수할 것, 3. 다시는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4. 양국은 형제국으로 칭할 것, 5. 후금과 맹약은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 것을 인정할 것의 다섯 가지 사항을 주장하여 1627년 4월, 조선과 후금은 형제 관계가 되는 강화 조약인 '정묘조약'을  맺게 된다. 그 결과 정묘호란은 종결되었지만 그 후로 조선은 후금의 위협을 계속해서 받게 된다.

· 병자호란(1636년)

정묘조약 이후 후금은 식량, 병선, 군사적 지원 등 무리한 요구를 하며 수시로 압록강 건너 민가를 약탈하기도 한다. 청나라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이 형제 관계가 아닌 새로 군신 관계를 맺고, 3만의 군사를 보낼 것'을 요구한다.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명의 북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때 사신으로 온 용골대, 마부대 등이 가지고 온 국서를 받기 거부하자 이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후금으로 도망치다가 조정의 유문을 탈취하여 간다. 그 유문에는 전시를 대비하고 여차하면 후금을 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를 읽은 청 태종은 1636년 4월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다. 대관식에 참가한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사죄하지 않으면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협박한다.

 

청태종은 1636년 12월 1일 1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한다.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한성으로 진군한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장계가 조정에 도착한 것은 12일이었다. 13일 오후 벌써 청군은 평양에 도착한다. 14일 개성에 청군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세자빈 강씨, 원손, 둘째 아들 봉림대군, 셋째 아들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피신시킨다. 그리고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1만 3천의 군사로 항전을 한다. 그러나 청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에 당도하여 1월 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서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한다. 청군에게 포위된 상태로 40여 일이 지나자 남한산성 안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린다. 인조를 도우려 오던 구원병들은 전투에서 대패하고 도주한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누어져 주화파 최명길의 주장대로 국서를 작성하여 화의를 청한다. 또한,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결국 조선은 항전 45일 만인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인조는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인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또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며 청 태종에게 항복하게 된다. 이를 '삼전도 굴욕'이라 하며 이로 인해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게 된다. 주요 내용으로 조선 국왕의 청의 신하로 충성을 맹세할 것, 조선의 왕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낼 것, 조선은 매년 청에 조공을 바칠 것, 조선은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등이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된다. 이후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은 청에 볼모로 잡혀가고, 척화파인 홍익한, 오달재, 윤집(척화 삼학사) 등 많은 조선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가는 등 큰 사회적 피해를 입게 된다. 홍익한, 윤집, 오달재이러한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은 철군하면서 조선에서 도적질을 일삼으며,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을 끌고 간다. 이들이 비싼 몸값을 치르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경우에는 환향녀라고 부르며 순결을 지키지 못하였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인과 인조의 지나친 친명사대주의는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는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중립외교를 제대로 받아들였으면 변란을 막을 수 있음은 물론 국력을 신장할 기회도 있었을 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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