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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16대 인조실록 1 - 인조반정과 등극 및 인조의 치세와 친명배금정책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9.

조선의 제16대 국왕 인조(1595 ~ 1649)의 이름은 이종(李倧)으로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원종)의 장남인 능양군이며, 어머니는 인헌왕후 구씨이다. 인조실록는 총 50권 50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623년 3월부터 1649년 5월까지 26년 2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650년 8월에 시작하여 1653년 6월에 완성한다. 편찬 작업에는 총재관 이경여, 김육을 비롯하여 총 66명이 참여한다. 

인조

 

인조의 등극

· 인조반정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로 왕위에 오른 후 불안정한 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북파와 함께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군과 그들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남인, 서인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다. 그 과정에 영창대군 사사와 인목대비 서궁 유폐 등으로 인해 많은 적을 만들게 되며, 이 과정에 자기 친동생 능창군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자 불만을 품은 능양군은 이귀, 김자점, 김류, 최명길, 이괄 등 이이, 성혼의 문하인 서인세력들과 역모하여 1623년 3월 12일인조반정을 일으킨다. 

 

· 추진 경과

이 역모서 평산부사 이귀, 함경도 병마사 이괄, 강계부사 김류가 군사를 준비하기로 한다. 인정반정이 발발하기 1년 전, 평산부사 이귀가 무장한 채로 도성을 공격하기 위해 '호랑이 사냥에 군사들이 도 경계를 구애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게 해 달라.'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이것이 사전에 누설되어 정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다. 그러자 능양군 등은 3월 13일 새벽에 거사를 하기로 확정하고 12일 밤 홍제원에 모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눈치를 채고 훈련도감 이확으로 하여금 역모가담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이 소식을 들은 이귀는 거사 시간을 앞당겨 겨우 700 명 군사를 이끌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모두 머리에 '의(義)'가 쓰인 띠를 두르고 거사를 실행한다. 한편 거사 계획이 탄로 났다는 소식을 들은 김류는 망설이다가 뒤늦게 합류하여 궁궐로 쳐들어 간다. 반란군이 창의문을 뚫자 능양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합류하고, 창덕궁에 도달하자 훈련도감 이확은 상황이 불리하다가 판단하여 공격하지 않는다. 대궐 밖에 진을 치고 있는 훈련대장 이흥립은 합류하기로 하였으며, 인정전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에 이르러 수문장 박효립도 합류한다. 반란군들은 손쉽게 돈화문에 이르러 불을 질러 승리를 알린다. 광해군은 그제야 궁궐이 점령되었다는 것을 알고 황급하게 내시의 등에 업혀 담을 넘어 궁궐을 빠져나간다. 능양군은 궁궐을 장악하자 제일 먼저 서궁에 인목대비를 찾아간다.

 

· 광해군 폐위 교서

인목대비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광해군이 패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광해군을 폐위하고 능양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다'라는 교서를 내린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한다는 이유로 1.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자신을 유폐하였다. 2. 과도한 토목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정사를 위태롭게 하였다. 3.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하였다. 이 세 가지를 들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이유는 오직 반정 세력들에게 거사의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실 첫 번째 이유는 인목대비가 줄곧 주장하는 것으로 이것으로 서궁에 유폐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과도한 토목 공사는 궁월 창건과 개수를 말하는 데 이것은 악정이 아니라 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세 번째 이유로 내세운 것은 두 마음 품었다는 것인데 광해군의 명과 후금 사이에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펼쳐 전란을 막고자 한 것이다. 능양군과 서인 세력들은 자신들의 반정의 정당성을 내세우려고 하였으나 사실 반정은 명에 대한 사대주의로 흘러 결국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와의 두 번의 전쟁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게 되며, 이후에 조선의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당시 광해군의 시대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에서 겨우 벗어나 나라가 안정기로 들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능양군과 서인 세력들이 자신들이 정쟁에서 밀려났다는 이유로 광해군이 다져 놓은 안정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던 사건이 인조반정이다. 

 

· 인조의 등극

도망친 광해군은 이틀 만에 의관 안국신의 집에서 상복인 흰 옷과 짚신 차림으로 변장하여 거처를 옮기려다 의관 정남수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도총부로 끌려 왔다. 왕비 유씨는 궁녀들과 함께 후원의 어수당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고, 폐세자 질 역시 숨었다가 잡힌다. 그 후 능양군은 경운궁에서 인목대비 앞에 엎드려 옥새를 하사할 것을 청하였고, 마침내 능양군은 인목대비로부터 옥쇄를 넘겨받아 즉시 즉위식을 거행한다. 조선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원종)의 장남이며, 광해군의 서조카, 인목대비의 서손자인 능양군이 왕으로 등극한다. 그가 바로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이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이다. 

 

 

인조의 치세와 친명배금정책

· 친명배금정책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하고, 정인홍, 이이첨을 처형하고대북파 세력 200여 명을 모두 숙청을 단행하고,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유배 중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반정에 참여한 서인세력인 김류, 이귀 등 33명을 정사공신으로 봉훈한다. 광해군 때 희생한 영창대군, 임해군, 김제남 등을 신원하고 나머지 희생자들의 관작을 복구시킨다. 따라서 조정은 서인이 제1당이 되고 남인이 2당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특히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후, 동인과 서인 등의 정치적 분파 간의 갈등을 조정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나, 붕당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인조는 광해군이 추진하여 왔던 실리주의적 중립외교 정책을 버리고 친명사대주의를 표명하여 친명 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인조의 재위 기간 중에 이괄의 난과 두 번에 걸친 청과의 전쟁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일어나게 된다. 그 결과 조선은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되며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되는 삼전도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후 조정은 청을 더욱 미워하여 망해가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를 더욱 강화한다. 이러한 인조의 친명사대주의 정책은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의 생각과는 달랐다. 결국 인조는 볼모에서 돌아온 소현세자를 불신하여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에 빠져 소현세자를 독살시키고 둘째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정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 결과 서인과 남인간의 치열한 예송논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김자점은 귀인 조소용의 자식인 옹주를 손자며느리로 맞아들여 조정의 정권을 독점하며 횡포를 일삼는다. 그 결과 조정은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 병권강화와 민생안정

이괄의 난이 끝나자 인조는 병권을 안전시키기 위하여 1624년 총융청, 수어청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에 힘쓴다. 군역의 세납화와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을 발표한다. 1628년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박연)로 하여금 훈련도감에서 대포를 제작하게 하여 화력을 증강시킨다. 그리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해 황폐화된 농경지 복구하고, 경기도에 한해 실시하던 대동법을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한다. 농토세인 전세법 폐지하여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 결당 4두로 고정해 징수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인다. 삼남 일대에 양전 실시하여 세수를 확대한다. 또한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유통을 원활히 한다. 청과의 무역을 위해 북관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의 중강에 시장을 연다(경원개시, 중강개시). 그러나 인조의 이러한 노력은 대부분 광해군 때 실시한 것이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임란 후 광해군 때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조선의 경제는 다시 전쟁으로 인해 파탄에 빠져,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다.

 

· 문화 및 학문의 진흥

1645년 청에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 정두원이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경, 과학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오고, 송인룡 등이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문화 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인조의 재위 기간 동안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 등 많은 책들이 간행되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여러 학자와 문인들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학자들은 현종, 숙종 때에 걸쳐 예송논쟁을 일으켜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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