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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15대 광해군일기 2 - 왕권강화와 대북파의 득세 및 가족들의 비참한 말로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8.

조선의 제15대 국왕 광해군(1575 ~ 1641)의 이름은 이혼(李琿)으로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광해군일기는 총 64권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15년 1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일기의 편찬은 1624년 2월에 시작하여 1627년 정묘호란으로 중단되었다가 1632년 12월에 완성한다. 광해군일기 중초본만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세력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 조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왕권 강화와 대북파의 득세 및 가족들의 비참한 말로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광해군묘

 

왕권 강화와 대북파의 득세

· 배경

조선은 선조 이후 적자가 아닌 서자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씨가 왕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된다. 광해군도 서자 출신이고 세자 책봉 과정에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세자가 되어 명나라의 세자 고명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로 겨우 왕위를 넘겨받게 되어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이 약하였다. 게다가 즉위하자마자 광해군의 집권을 반대하던 서인세력소북세력은 은밀히 명나라에 세자책봉의 진상조사단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따라서 광해군대북파들은 왕권을 위협하는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군 등을 지지하는 소북파를 몰아내고 왕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 대북파의 집권과정

왕권을 강화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광해군은 1608년 즉위하자마자 왕위계승과정에 계략을 부린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을 유배를 보내 죽인다. 얼마 후 명나라에서 세자책봉에 대한 현장조사를 위해 사신을 보내온다. 이러한 무례한 처사에 광해군의 분노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명에 대한 사대주의를 주장하는 유생들에게 돌아간다. 여기에 권력욕에 불타는 대북파 정치인들이 광해군을 부추긴다. 1609년 그들은 명의 현장조사에 임해군이 문제 발생의 소지가 있다고 여겨 왕권에 위협되는 친형 임해군을 유배 보내 사사한다. 1611년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에 반대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한다. 그러자 광해군은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모두 쫓아낸다. 1612년 김경립이 어보, 관인을 위조하여 군역을 피하려다가 잡혀 갇히게 된다.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이 김경립, 그의 동생 김익진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8도에 각각 대장과 별장을 정해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세력과 광해군을 축출하려고, 주동자로 김직재와 아들 김백함, 사위 황보 신이 역모를 계획하였다'라는 거짓 진술을 받아낸다. 이로 인해 그들이 왕으로 추대한 진릉군 이태경과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처형되고, 소북파의 1백여 명이 고문 끝에 사망하거나 유배된다. 이 사건은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무고한 옥사로 '김직재의 옥'이라고 한다.

 

· 7서의 옥

한편 대북파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그의 생모인 인목왕후를 축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광해군 5년 1613년 3월 조정 대신들의 서얼인 박응서, 심우영, 서양갑, 박치의, 박치인, 이경준, 허홍인 이들 7명이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의 은을 강탈하는 강도사건이 발생하여 옥에 가두는 '7서의 옥'이 일어난다. 이이첨 등은 이들을 심문하여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이 주도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해 인목대비의 수렴청정을 위한 거사 자금 마련하는 역모 사건'으로 자백을 받아낸다. 왕권의 정통성이 없어 1609년 선조의 첫째 왕자 임해군까지 제거하였던 광해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영창대군을 폐서인하여 강화도로 유배한 후 위리안치(집 주위에 울타리를 쳐서 밖으로 못 나오게 하는 조치)하였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증살(방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는 것) 한다. 그리고 김제남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후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킨다. 또한 선조의 유명을 받은 일곱 신하들을 삭직 시킨다. 이 사건을 흔히 '계축옥사'라고도 하며,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된다.

 

· 신경희의 옥사

1615년 인조(능양군)의 아우인 능창군은 총명하고 비범하여 광해군과 대북세력의 견제를 받아 온다. 죄수 소명국이 '능창군이 수안군수 신경희와 짜고 왕이 되고자 한다'라고 무고한다. 그 결과 능창군은 강화도 교통에 위리안치되어 살해 위협을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신경희는 사형당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등 많은 사람이 유배를 가게 된다. 이러한 '능창군 추대사건'을 '신경희의 옥사'라고 한다. 그 후 1617년에 폐모론이 대두하여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의 폐모 반대론자들을 유배시키고, 1618년에 이이첨 등 강경론자들은 인목대비를 사사할 것을 간언 하지만 광해군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후에도 이이첨은 몇 차례에 걸쳐 인목대비를 암살하려 하였지만 다른 대신들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한다. 이로써 광해군과 대북파들은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 인조반정

대북파의 의견에 따라 패륜을 저지른 광해군은 서인들에게 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어 1623년에 김류, 이귀, 김자점 등사대주의자들과 능양군은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고,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정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에 너무 많은 적을 양산하고 이들의 감시를 소홀히 하였으며, 이이첨, 정인홍 등의 대북세력이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광해군은 정세를 바라보는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명군의 원조 요청에 병력을 동원하여 도성과 궁궐의 치안을 소홀히 하였다. 그 결과 광해군은 서인들의 음모를 미연에 막지 못하고 쉽게 왕위를 빼앗기고 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만다. 인목왕후는 복위되어 대왕대비가 되고, '7서의 옥'은 이이첨 등이 박응서 등을 이용해 무고하여 일으킨 것으로 규정된다. 

 

 

가족들의 비참한 말로

· 가족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10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부인과 자식은 다음과 같다. 폐비 유씨(문성군 부인)에게 1남(폐세자 질), 숙의 윤씨에게 1녀(옹주), 숙의 허씨, 숙의 홍씨, 숙의 권씨, 숙의 원씨, 소용 임씨, 소용 정씨, 숙원 신씨, 조씨가 있다. 

 

· 가족들의 말로

광해군의 가족들은 인목대비의 복수심과 인조반정 세력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질, 폐세자빈 박씨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동문 쪽에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부부는 서문 쪽에 각각 위리안치되었다. 이들이 울타리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에 20대 중반인 폐세자 부부는 담밑구멍을 뚫어 도망가려다 잡히는 데 폐세자 질의  손에 은덩어리와 쌀밥, 황해도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들려 있었다. 은덩어리로 뇌물을 써 강화도를 탈출하여 평양감사와 모의를 하여 반정 세력을 축출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목대비와 반정세력들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폐세자 질은 스스로 자결하고 만다. 그때 세자빈 박씨도 나무 위에서 망을 보다가 떨어져 얼마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로부터 1년 반쯤 지난 뒤 광해군은 다시 부인 폐비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1624년 2월 폐비 유씨가 유배생활 1년 7개월 만에 화병을 얻어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 광해군의 죽음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부인마저 잃은 광해군에게는 박씨 일가로 시집을 간 옹주 한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인목대비와 반정세력들은 몇 번이나 광해군을 죽이려고 시도를 하나 영의정인 남인 이원익의 반대로 실패한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 재등극이 염려되어 그를 태안으로 옮겼다가 난이 진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온다.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하여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자 그를 교동으로 안치한다. 이때 서인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살해하라고 암시하였으나 오히려 경기수사는 광해군을 보호한다. 1637년 조선이 청에게 완전히 굴복한 삼전도 굴욕 후에는 광해군을 제주도로 보낸다.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굴욕을 참으며 18년을 유배생활을 하다가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묘 근처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고 1641년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능은 경기도 남영주군 진건면에 소재하고 있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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