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14대 국왕 선조(1552 ~ 1608)의 이름은 이환(李昖)으로,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 이초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鈞)이며, 어머니는 하동부대부인 정씨이다. 선조실록은 총 221권 116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567년 7월부터 1608년 2월까지 40년 7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609년 7월에 시작하여 다음 해 11월에 완성한다. 이항복, 기자헌이 총재관으로 총 222인이 편찬 작업에 투입된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난세의 영웅들 이순신, 곽재우 및 선조시대의 석학들 율곡 이이, 송강 정철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난세의 영웅들
임진왜란은 이순신, 권율, 김시민 등 유명한 장군과 곽재우, 정인홍, 김천일, 고경명, 휴정, 정문부 등 수많은 의병장이 활약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 내어 나라를 구하게 된다. 또한 일본과 싸워 크게 이긴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는 1.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1592. 7) , 2. 김시민 장군의 진주 대첩(1592. 10), 3. 권율 장군의 행주 대첩(1593. 2)이 있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성웅 이순신과 홍의장군 곽재우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 성웅 이순신(1545 ~ 1598)
이순신(李舜臣)은 한성부 건천동에서 문반 가문의 이정과 변수림의 딸 초계 변씨 사이 네 아들(희신, 요신, 순신, 우신) 중 셋째로 태어났으며,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이다. 그는 1576년 32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시작해 훈련원참군을 거쳐 조산보만호가 된다. 그는 조산보만호일 때 국방 강화를 위해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가 조정의 문책을 받아 삭탈관직되고 백의종군하게 된다. 그 후 유성룡의 천거로 고사리 첨사에 이어 만포첨사, 진도군수를 거쳐 47세가 되던 1591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후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다. 곧바로 그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량확보를 위해 둔전 설치를 조정에 건의하고,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한다. 이듬해 1592년 4월 13일 경상우수사 원균의 급보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경상좌수사 박홍과 우수사 원균은 이미 왜군에게 경상도 제해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이순신은 5월 4일 85척의 선단을 이끌고 한산도에서 전선 3척과 협선 2척뿐인 원균을 만나 연합 함대를 조성하여 옥포에서 적선 26척을 격파하여 첫 승리를 하는 옥포해전을 치른다. 다음날 고성 적진포에서 다시 적선 13척을 궤멸시킨다. 그 후 사천에 출현한 왜선 10여 척을 처음으로 거북선을 진출시켜 전멸을 시키는 사천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는다. 이후 당포에서 왜선 20여 척,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당항포에서 20여 척, 7월 8일에 한산도에서 이억기, 원균과 함께 학익진 전법을 사용하여 적선 47척을 격파하고 12척을 나포하는 한산도대첩에 승리를 거두고, 가덕도 부근에서 60여 척을 격파하고 드디어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략할 계획을 세운다. 전라도 좌우수사 연합 선단 170여 척은 1592년 9월 1일 적함 500여 척이 정박하고 있는 부산포에 도착하여 급습한다. 이 부산포해전에서 왜군은 전함 100여 척이 격파되자 육지로 도망치고, 아군은 30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렇게 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순신은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한다.
그 후 명나라 수군과 합세하여 왜군을 수차례 궤멸시키며 왜군의 서해안 진출을 완전히 봉쇄한다. 1594년부터 3년 동안 명과 일본의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이순신은 군사훈련, 군비확충 등으로 재침에 대비한다. 1597년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유성룡, 이원익 등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선조는 묵살하고 이순신을 삭탈관직당하여 백의종군하게 한다. 그 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고 수군과 함대를 모두 잃고 자신도 전사하고 만다. 그러자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때 조선의 수군은 12척의 배와 수군 120명만 남아 있었다. 1597년 10월 26일 명량해협에서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133척의 적함을 상대하여 명량해전을 적함 31척을 격파하고 아군은 몇 명만 부상을 당하는 승리로 이끈다. 명량해전으로 이순신은 다시 제해권을 되찾고 보화도와 고금도를 본거지로 삼고 백성을 모으고 군량을 비축한다. 그러자 삽시간에 장병들과 백성들이 모여들어 군진은 한산도 시절의 10배를 능가하게 되어 다시 조선 수군을 회복하게 된다. 1598년 11월 퇴로를 찾던 왜군이 50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노량 앞바다로 밀려오자 이순신은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여 불과 50여 척의 적선만 살아 돌아간다.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아 5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사후 이순신은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 홍의장군 곽재우(1552 ~ 1617)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문은 황해도 관찰사 곽월의 아들이고 조식의 외손자로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한다. 1585년 34세의 나이로 별시 정시 2등에 합격하였으나 지은 글이 왕에게 거슬려서 합격이 취소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돈지에 강사를 짓고 은거를 결심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곽재우는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령, 현풍, 창녕, 진주 등지에서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다니며 '천강홍의장군'이라는 깃발을 들고 싸웠다. 2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을 이끌고 왜군이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정암진에서 완전히 차단하여 이순신의 배후를 보호한다. 1592년에 곽재우는 의병을 이끌고 김시민 장군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그 공으로 형조정랑, 절충장군을 거쳐 성주목사에 올라 악견산성 등을 수축한다. 1593년에 곽재우는 화왕산성 전투에서도 의병을 이끌고 뛰어난 전략과 용맹함으로 왜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다. 이 두 전투에서 곽재우는 용맹함과 전술적 능력을 잘 보여주어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1595년 강화회담이 진행되자 벼슬을 내놓고 현풍 가택으로 돌아간다. 1599년 곽재우는 경상우도방어사를 사양하자, 다시 10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부임되어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귀향한다. 이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귀양가 2년 만에 풀려난다. 그 후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창암진에 망우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한다. 그 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선산부사, 안동부사를 제안받았으나 역시 거절한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1608년 삼도수군통제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그 역시 거절한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함경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1612년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고 은거한다. 그 후 곽재우는 1617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곽재우는 시문에도 능하여 '망우당집'이라는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선조시대의 석학들
· 율곡 이이(1536 ~ 1584)
율곡 이이는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강릉에서 태어나 자를 숙헌, 호는 율곡, 우재, 석담이다. 이이가 태어나던 날 밤 어머니 신씨가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하여 아명을 현룡이라 하고, 태어난 곳을 몽룡실이라 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8세에 시를 지어 놀라게 하였으며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한다. 19세에 성혼과 학문을 논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이듬해 하산하여 유학에 정진한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고 29세에 관직에 나아가 호조좌랑이 된다. 이후 예조, 이조좌랑을 거쳐 명나라에 다녀온다. 그 후 <동호문답>, <만언봉사>, <격몽요결>, <기자실기>를 편찬한다. 47세에 이조판서가 되어 <김시습전>을 짓고, <시무육조>를 개진하고, 왜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십만양병설을 주장한다. 1584년 4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자운산 선영에 소재하고 있으며, 파주의 자운선원, 강릉의 송담선원, 풍덕의 구암선원, 황주의 백록동 선원 등 20여 개의 서원에 배향되고 있다. 이이는 정쟁이 심화되자 이를 중재하여 조정을 평화로 이끌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서경덕의 '기일원론'과 퇴계 이황의 '이선기후론'의 중용을 취하면서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여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중용정신을 이끌어 낸다. 즉 그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본 중심의 사상은 후기 실학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 송강 정철(1536 ~ 1593)
송강 정철은 돈녕부판관 정유침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시인, 문신, 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 자는 계함, 호는 송강, 칩암거사이며, 시호는 문청이다. 그의 큰 누이는 인종의 귀인이며, 둘째 누이는 월산대군의 손자이며 계성군의 양자인 계림군 유의 부인이다. 따서는 그는 어릴 때부터 궁중을 출입하여 경원대군(명종)과 벗으로 지낼 수 있었다. 10세인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연루되어 맏형은 유배 중에 죽고, 그도 아버지를 따라 유배생활을 한다. 1551년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자 담양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0년을 보낸다. 이때 시를 배우고 송순, 기대승 같은 최고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익히게 되고 이이, 성혼 등과 사귀게 된다. 17세에 부자인 유강항의 딸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낳는다. 정철은 26세인 156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으로 첫 관직을 시작한다. 이때 처음 맡은 국왕의 사촌동생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명종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시켜버린다. 화가 난 명종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킨다. 나중에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올라와 31세에 직강, 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하다가 32세에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하게 된다. 그 후 좌랑, 교리를 거쳐 전라도암행어사가 되었다가 40세인 1575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그의 강직한 성격은 당쟁의 불씨가 되어 서인의 대표로 동인인 김효원을 맹렬히 비난하자 이이로부터 그러지 말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하여 낙향한 것이다. 그 후 1578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사간, 직제학을 거쳐 승지가 되었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다시 낙향한다. 1580년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관동별곡> 등 16수의 시조와 가사문학을 짓는다. 그 뒤 1583년 48세 때 예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4년 동안 향촌에 은거한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시조와 한시를 창작하여 한국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다. 54세 때 '정여립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우의정에 발탁되고 다음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56세에 영의정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광해군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유배를 가게 된다. 그 후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체찰사를 역임하다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온다. 다시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 송정촌에 머물다가 58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는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 등 여러 정치적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서인의 대표로 활동했다. 동인과의 갈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파직과 유배를 겪는다. 그는 중앙에 있을 때에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말을 직선적으로 하는 버릇이 있어, 정적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여 격렬한 논쟁을 일삼는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지방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업무를 잘 수행하며, 수려한 자연경관을 벗 삼아 뛰어난 문학적 기질을 발휘한다. 그 결과 한시 758수, 시조 80여 수, 가사 4편을 남겼으며, 대표작으로는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당대 시조문학과 가사문학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에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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