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15대 국왕 광해군(1575 ~ 1641)의 이름은 이혼(李琿)으로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광해군일기는 총 64권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15년 1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일기의 편찬은 1624년 2월에 시작하여 1627년 정묘호란으로 중단되었다가 1632년 12월에 완성한다. 윤방을 총재관으로 3개 조가 편찬 작업에 투입된다. 광해군일기 중초본만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세력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 조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왕이 된 광해군
· 세자책봉문제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 박씨를 비롯하여 총 8명의 부인을 두고 14남 11녀의 자식을 얻었다. 그러나 정비 의인왕후 박씨 소생은 없었다. 따라서 14명의 서자들 중에 세자를 선택하여야 했다. 선조 자신이 방계 혈통으로 왕이 되었으므로 정비 의인왕후는 와병 중이라 더 이상 적자를 볼 수 없는 입장인데도 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고만 있었다. 선조의 나이가 40세가 넘어가자, 1591년 서인인 좌의정 정철은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과 세자책봉(건저) 문제를 논의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기로 결정하고 선조에게 함께 주청을 하기로 한다. 이때 동인인 이산해는 서인인 정철을 모함하려는 계략을 꾸민다. 그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을 총애하는 것을 알고 인빈을 찾아가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여 인빈과 신성군을 죽으려고 한다'라는 거짓 음모를 전한다. 그러자 인빈은 선조에게 고자질하자 선조를 정철을 벼르고 있었다. 내막도 모르고 정철은 혼자 경연장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청 하다가 선조의 진노로 큰 화를 당한다. 이 사건으로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서인인 이성중, 이해수 등은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난다. 이때부터 인조반정까지 30여 년 동안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 인목왕후와 영창대군
그 후 1594년 선조가 세자 고명을 받기 위해 윤근수를 명나라로 파견한다. 그러나 명은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비록 세자이지만 불안정한 처지인 광해군은 임란 때 분조 체제의 소임을 다하여 조야에 명망을 얻어 명실상부한 세자로 인식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1602년 인목왕후 김씨가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는다. 선조는 늦은 나이로 낳은 영창대군을 총애하여 광해군을 폐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는다. 대신들은 영창대군 지지하는 유영경 등의 소북파와 광해군 지지하는 이이첨 등의 대북파로 나누어지고 만다. 유영경 등의 소북파는 선조의 뜻에 부응하여 광해군이 서자이며 차남에다 명의 고명도 받지 못하였으므로 적통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 광해군의 즉위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자 현실적인 판단으로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영의정 유영경은 선위교서를 공포하지 않고 숨겨버린다. 이후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들이 이일을 알게 되어 유영경을 벌할 것을 간언 하지만 선조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갑자기 사망한다. 그러자 유영경은 왕위 계승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인목대비 김씨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을 종용하였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1608년 2월 2일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그가 바로 조선 제15대 국왕 광해군이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이었다.
실리주의 정책
광해군의 실리주의 정책은 주로 외교와 내정에서 나타나며 조선의 안정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 한편 영창대군 사사와 인목대비 유폐 등과 같은 패륜적인 정치적 행동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후에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광해군에 대한 평가와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광해군은 밖으로는 철저한 실리주의 외교 노선을 걸었고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 강화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 외교 정책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을 소진하고 있을 때 여진족은 만주에서 건주위 추장 누루하치를 추대하여 1610년 후금을 세운다. 이후 그들은 비옥한 남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명나라를 침범한다. 조선은 이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평양감사에 박엽, 만표첨사에 정충신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한다. 그러자 명은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후금을 토벌하는 한편 조선에 원병을 청한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펼쳐 균형을 유지하며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였다. 1619년 광해군은 명나라 원병 요청에 도원수 강홍립에게 1만 3천을 주어 압록강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명의 모문룡 부대에 합류하다가 상황에 맞추어 행동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이에 강홍립은 사르후 전투와 부차전투에서 명나라가 패하자 적당히 싸우는 체하다가 후금에 투항해 누루하치와 화의를 맺도록 한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계속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내 후금의 동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후금과의 전쟁을 예방하는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일본과의 외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1609년 광해군은 송사약조로 임란으로 중단되었던 대일 외교를 재개한다. 1617년 오윤겸을 화답사로 일본에 파견한다. 이로써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 내정 정책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우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임란 이후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전쟁 중에 소실된 궁궐을 창건하고 개수 작업으로 1608년 청덕궁을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 1621년 인경궁을 중건하여 왕실의 위엄을 살린다. 그리고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세금을 일원화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한다. 대동법은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던 것을 쌀 등으로 대신하게 한 것이다. 1611년 양전을 실시하여 농지를 측량하고 실제 작황을 조사하는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정을 확보한다. 또한, 광해군은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남인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등용하는 등 남인과 대북인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한다. 그리고 광해군은 수도를 교하로 천도할 것을 결정하여 정씨 왕조설을 일소하고 전란으로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려고 하였으나 결국 시행되지 못한다. 한편 광해군은 임란으로 소실된 서적을 다시 간행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간행하고 <국조보감>을 다시 편찬한다. 그리고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이 편찬되어 문학과 의학에 큰 발전을 이룬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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