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14대 국왕 선조(1552 ~ 1608)의 이름은 이환(李昖)으로,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 이초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鈞)이며, 어머니는 하동부대부인 정씨이다. 선조실록은 총 221권 116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567년 7월부터 1608년 2월까지 40년 7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609년 7월에 시작하여 다음 해 11월에 완성한다. 이항복, 기자헌이 총재관으로 총 222인이 편찬 작업에 투입된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사림의 분열과 붕당정치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사림의 분열과 붕당정치
· 붕당정치
16세기에는 외척세력이 사라지고 정권을 잡은 사림세력은 학맥과 사상의 차이에 따라 붕당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당시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동쪽 건천동에 집이 있는 김효원의 동인과 서쪽 정동에 집이 있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의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어 당파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동인에는 주리철학을 주장하는 조식과 이황의 제자들인 영남학파, 서인에는 주기철학을 주장하는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인 기호학파가 참여한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심해지자 대사헌 이이는 이를 막기 위해 심의겸을 개성유수, 김효원을 부령부사로 외직으로 물러앉게 한다. 그 후 1580년 낙향했던 심의겸이 예조판서에 제수되자 동인인 정인홍이 그를 탄핵하자, 이이가 이를 중재하여 막는다. 그러나 중재자이던 이이가 1584년 사망하자 동인과 서인은 본격적으로 정치 투쟁을 하게 된다.
이이가 죽자 동인들이 서인의 대표 심의겸을 탄핵하여 파직시킨다. 1589년 정여립은 전주 출신의 학자로, 한때 서인으로 이이의 제자였으나 후에 이이와 성혼을 비판하며 동인으로 전향한다. 그후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 황해도로 가서 제자를 키우며 동인들의 존경을 받게된다. 그러던 중 황해도 관찰사가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병권을 장악하여 모반을 꾀한다'라고 조정에 고변한다. 결국 모함에 빠진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결국 서인인 정철이 사건을 조사하며 약 1,000명의 동인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호남 지역과 동인 세력이 큰 타격을 받는다. 이 사건을 '정여립 모반사건', 또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그 결과 서인이 일시적으로 조정을 장악하였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그 후 1591년 세자 책봉문제(정철의 건저의 사건)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한다. 서인의 정철은 동인의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말하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서 삭탈관직된다. 당시 좌의정이던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과 상의하고, 최종 결정을 위해 영의정 이산해와도 자리를 함께 하기로 하였으나 이산해는 두 번이나 약속을 어기고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후궁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과 공모하여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올리고 신성군과 어머니 인빈 김씨를 죽이려고 한다'라고 무고한다. 이 사건으로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서인인 이성중, 이해수 등은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난다.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에 들어가고 이때부터 인조반정까지 30여 년 동안 동인이 집권하게 된다. 동인은 다시 정철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이산해, 이발, 정인홍 등의 과격파인 조식 문하의 북인과 귀양을 보내야 한다는 우성전, 유성룡, 김성일 등의 온건파인 이황 문하의 남인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분당 이후 우성전, 유성룡, 김성일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이 한 때 정권을 잡았으나, 1602년 조식의 문하인 정인홍 등의 북인이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친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을 하여 삭탈관직되고 쫓겨나고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정권을 잡은 북인은 다시 이산해, 홍여순 등 노장세력들이 영도하는 당으로 기자헌, 이이첨, 허균 등이 속하는 대북과 남이공, 김신국 등 소장세력들이 영도하는 당으로 유영경, 박이서, 성준구 등이 속하는 소북으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나누어져 선조 말기에는 북인의 세상이 된다. 그리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대북세력이 거의 정권을 독점하게 된다. 그러나 광해군 때가 되어 대북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폐위'를 주장하는 이산해의 골북과 홍여순, 이이첨의 육북,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유몽인의 중북으로 다시 세 개의 분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조선의 붕당정치는 끝없이 분파로 나누어지면서 이어져 온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일당 독재의 경향을 보이며 미숙하였지만 점점 후에 인조 대에 이르러서는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며 상호 비판하는 체제를 갖추며 붕당정치의 참모습을 실현하게 된다. 당쟁, 즉 붕당정치에서는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 것이 바로 공존하는 방법이었다.
· 붕당정치의 장단점
붕당정치는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 결정에 반영할 수 있으며, 정치적 경쟁을 통해 정치적 활력과 사회적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상호 견제와 협력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정치적 타협을 통해 왕권과 신권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특정 정파의 전횡을 차단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붕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기축옥사와 같은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며,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부정부패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붕당 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정치적 분열과 갈등이 증가되는 단점도 있다. 따라서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붕당정치인 당쟁이 아니라 조선말 안동김씨, 풍양조씨, 대원군 등의 외척, 인척에 의한 일당, 일부 세력의 독재로 말미암은 것이다.
· 선조와 붕당정치의 평가
선조는 임진왜란을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우유부단한 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명종시대의 외척정치의 혼란함을 없애고 신권중심의 왕도정치를 구현한 뛰어난 왕이었다. 선조는 역모로 취급하는 붕당행위를 정치적인 개념으로 승화시켜 당파정치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붕당정치가 과도기적인 양상으로 다분히 혼란을 야기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그의 성리학적 왕도정치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아무튼 선조가 추구하려고 한 당파중심의 신권정치는 근대적 정치 형태인 의회정치를 이끌어 낼 수도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이 당파싸움에 의한 국력이 약해져서 일어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당시 선조 때의 조선은 선조의 정치적 안정을 위한 노력으로 명종 때 비하여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은 전국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후 세력의 힘을 외부로 돌려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민심을 하나로 묶으려는 의도에서 일으킨 전쟁이었다. 다만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조선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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