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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13대 명종실록 1 - 명종의 등극과 문정왕후 및 사망과 가족들, 이언적 이황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4.

조선의 제13대 국왕 명종(1534 ~ 1567)의 이름은 이환(李峘)이며, 자는 대양(對陽)이다. 중종의 아홉째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문정왕후 윤씨이다. 명종실록은 총 34권 34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545년 7월부터 1567년 6월까지 22년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568년 8월 춘추관에 실록청을 두고 편찬을 시작하여 약 3년 만인 1571년 4월에 완성한다. 편찬에는 춘추관감사 홍섬, 지춘추관사 오겸, 이황 등을 비롯하여 총 77명이 참여한다. 

명종

 

명종의 등극과 문정왕후

· 명종의 등극

문정왕후는 35세의 늦은 나이에 어렵게 아들 경원대군을 낳는다. 그때 중종 큰아들인 장경왕후의 소생 인종은 20세였다. 따라서 경원대군이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인종이 후사가 없이 죽게 된다면 아들 경원대군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1545년 7월, 마침내 문정왕후가 그토록 바라왔던 아들 경원대군(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이 된다. 그때 그는 비록 어리지만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포악하고 권력욕이 많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기세에 눌려 평생 눈물로 왕위를 지켜야만 했다. 

 

· 문정왕후의 권력욕

문정왕후는 아들 경원대군(명종)이 왕이 되자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한다. 그녀는 동생 윤원형 일파(소윤)에게 전권을 주어 인종의 외척인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대윤)를 제거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죽이고 친형인 윤원로를 귀향 보낸다. 그녀는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하여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할 때 명종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수렴청정이 끝난 후에도 깊이 정치에 간섭하여 조정을 시끄럽게 하였으며, 자기의 요구를 적어 보내 들어주지 않으면 심지어 왕에게도 종아리나 빰을 때리기도 하며 반말로 욕을 하기도 한다. 을사사화 이후 윤원형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나머지 윤임 일파와 이언적, 백인걸 등 사림세력의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고 권력을 잡자 '외척 전횡시대'가 도래한다. 윤원형은 친형인 윤원로를 사사하고, 그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으로 만든다. 또한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부를 축척하며, 윤원형은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하며 부를 축척하고 남의 노예를 빼앗는다. 이에 명종은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인 이량을 중용한다. 그러나 이량조차도 자신의 세력을 키워 정치를 농단하고 축재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윤원형, 심통원, 이량'조선의 3흉'이라고 했다. 한편 문정왕후는 정난정의 소개로 알게 된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에 앉히고, 승과, 도첩제를 다시 실시한다. 이에 명종은 그녀의 지나친 권력욕에 불만을 품고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신진 사림세력들을 등용시켜 외척 세력들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그녀의 방해로 실패한다. 이러한 조정을 패권다툼의 장으로 몰아갔던 문정왕후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죽자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고, 윤원형은 그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한다. 조정은 점점 안정을 되찾고 사회도 질서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지 2년 만에 병을 얻어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명종의 사망과 가족들

· 사망과 가족들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끝없는 정권욕과 혼란한 국정에 시달려 병을 얻게 된다. 결국 문정왕후가 죽은 지 2년 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명종은 인순왕후를 비롯하여 7명의 부인들 두었으나, 자식은 인순왕후 심씨에게서 순회세자 만을 얻는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13세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후사를 잇지 못하였다. 결국 왕위는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이어받게 된다. 하성군의 즉위로 조선의 왕은 후궁에서 태어난 서얼 출신 방계혈족이 왕위를 잇게 된다. 명종의 능은 강릉으로 현재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소재하고 있다. 

 

· 인순왕후 심씨(1532 ~ 1575)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5년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어 1551년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그는 13세에 요절한다. 1567년 명종이 죽자 대비가 되어 16세인 선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하였으며, 1568년 섭정에서 물러나 1575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능은 명종의 능인 강릉에 함께 묻히게 된다.

 

· 순회세자(1551 ~ 1563)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 태어나 이름은 부, 아명은 곤령이다. 그는 1557년 7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어 1559년 호군 윤옥의 딸과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없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유명한 사람들

· 주리철학 선구자 이언적(1491 ~ 1553)

회재 이언적은 경주에서 태어난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주리철학의 선구자로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복고, 호는 회재(晦齋)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리학을 공부하여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완성한다. 그는 무극태극논쟁을 통해 이기론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손숙돈과 조한보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확립하여, 이황에게 전해주어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1514년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의 요직을 맡았으며, 윤원형 일파가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관직에 물러난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6년 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이후 복직하여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의 저서로는 <구인록>, <대학장구보유>, <중용구경연의>, <봉선잡의> 등이 있다. 특히 <구인록>은 유교경전의 핵심개념으로 인(仁)에 대한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으며, 주희의 격물치지를 거부하고 철저한 주리론적 입장에서 유학의 근본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도학적 수양론실천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이황에 의해 집대성되어 영남학파를 이루는 근거가 되었다.

· 조선 성리학 최고봉 이황(1501 ~ 1570)

퇴계 이황은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에서 좌찬성 이식과 춘천 박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한국 성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후실인 생모 박씨의 가르침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12세에 숙부 송재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운다. 이황은 34세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가 된다. 을사사화 이후 46세 때 병약함을 핑계로 고향 낙동강 상류 토계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한다. 그 후 단양군수, 풍기군수, 특히 풍기군수 재임 중 '소수서원'을 설립하여 학문을 장려한다. 그후 49세가 되던 해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한서암을 짓고 학문에 심취한다. 52세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된다. 그후 다시 낙향하여 도산서당을 짓고 7년간 기거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다. 명종은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여 도산의 풍경을 그려 병풍을 만들어 보았다고 한다. 그 후 선조 때 68세의 노구로 대제학을 맡고 선조의 통치철학이 되는 <무진육조소>를 올린다. 이황은 주자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주자대전>을 주해하고, <성학십도>를 저술하여 선조에게 바친다. 69세에 이조판서를 사직하고 낙향을 허락받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듬해 나이 70세에 세상을 떠난다. 선조는 그를 영의정의 예로 장사를 지내게 한다. 그는 많은 제자(유성룡, 김성일, 기대승, 조목, 이산해, 이강이 등 260여 명)들을 양성하여 나아가서는 영남학파(성혼, 정시한, 이재, 이익, 이항로 등)를 형성하여 조선 주리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황이 죽은 후 그의 학문과 인격을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이 설립되어 그의 위패가 모셔진다. 이황은 한국 성리학의 거장으로서, 그의 학문과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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