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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11대 중종실록 1 - 중종반정과 등극 및 중종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2.

조선의 제11대 국왕 중종(1488 ~ 1544)의 이름은 이역(李懌)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이며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이다. 중종실록은 총 105권 102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506년 9월부터 1544년 11월까지 38년 2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원명은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실록'이다. 실록의 편찬은 명종즉위 후 1546년 춘추관에 실록청을 두고 편찬을 시작하여 1550년 10월에 완성한다. 편찬작업에는 총재관으로 정순붕, 심연원, 이기를 임명하는 등 총 134명이 실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중종실록>은 당시 훈구세력들에 의해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공정성이 의심받는다. 

중종

 

중종반정과 등극

·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

연산군은 모든 권력을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을 없애고 상소, 격고 등 여론 제도를 철폐한다. 그리고 성균관, 원각사 없애고 연방원을 두어 기생들의 모임 장소와 주색장으로 사용하고, 선종의 본산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만든다. 전국에 채홍사를 보내 뽑힌 기생인 흥청들을 선발하여 궁중에 불러들여 연회를 연다. 연산군을 비방하는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언문구결> 등 한글 서적을 불태우는 등 폭정을 일삼는다. 결국 전국 각지에서 연산군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 중종의 등극

이러한 반정의 무리 중에는 성희안이 있었다. 성희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종사관, 형조참판을 거쳐 1504년에는 이조참판에 있었다. 그는 연산군이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연산군을 비판하는 시를 올렸다가 종 9품 부사용이라는 최하 말단으로 좌천된다. 한편 박원종은 한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주요 재정을 담당하는 좌부승지였다가 연산군의 사치를 비판하는 간언을 하다가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된다. 그 후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506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있었다. 그의 누이이며 절색인 박씨 부인이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후실이 된다. 그런데 연산군이 큰어머니가 되는 박씨 부인에게 흑심을 품고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을 하자 박씨 부인은 자결한다. 박씨부인사건으로 박원종은 연산군을 미워하게 되며, 그는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탈관직된다. 성희안은 가장 먼저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무인 출신이며 연산군을 증오하는 박원종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들은 이조판서 유순정을 끌어들이고, 연산군의 신임을 받는 신윤무와 무장 장정, 박문영 등의 호응을 얻어낸다. 마침내 1506년 9월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날을 거사일로 잡는다. 그러나 석벽 나들이가 갑자기 취소되고 호남에서 귀양살이하는 유빈, 이과 등이 거사일을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군사를 일으켜 예정일에 거사를 거행한다.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궐내로 들어가 장악한다. 이들은 연산군을 폐하고 둘째 아들 19세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이튿날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니, 그가 바로 조선의 11대 국왕 중종이다. 이 사건을 중종반정이라 한다. 반정이 성공하자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를 보낸다. 두 달 후 1506년 11월 연산군은 그곳에서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중종반정의 결과 12년에 걸친 연산군과 임사홍 등의 궁중파의 독재정치는 종식되고, 조정의 주도권은 훈구세력에게 돌아가 성종이전의 정치형태로 돌아가게 된다. 

 

 

중종의 개혁실패와 기묘사화

· 중종의 개혁정치 실패

중종은 등극한 뒤 제일 먼저 연산군의 폐정으로 문란해진 나라 기강을 바로 잡는데 역점을 둔다. 홍문관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며, 문신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시행하여 문벌 세가들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반정공신들의 세력에 밀려 거의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그러던 중 중종 4년 1510년 영의정 박원종이 사망하여 공신세력이 위축되자, 중종은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도학주의 실천사상을 주장하는  김굉필의 문하이며, 신진 사림세력의 영수로 급진적 개혁론자인 조광조를 끌어들인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중종은 훈구세력의 간언을 받아들여 1519년 기묘사화로 그를 숙청시키고 만다. 그 결과 조정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중종의 개혁정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실패하게 된다. 1. 훈구파의 반발: 중종과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2.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면이 있어 보수적인 훈구 세력뿐만 아니라 중종에게도 부담이 된다. 3. 정치적 불안: 중종 시기에는 기묘사화와 같은 정치적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어 개혁정치의 추진이 어려워졌다. 4. 소격서 폐지 문제: 조광조와 신진사류는 도교와 관련된 소격서를 폐지하려 하다가 왕과의 충돌을 일으켜 개혁정치의 실패를 가속화시켰다. 결국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4년 동안 조광조를 통한 중종의 개혁정치는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정치철학의 부재로 실패하게 된다.

 

·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조광조는 유교적 이상정치 도덕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중종 때의 대표적인 사림파 학자이자 정치가로, 그의 주요 개혁정책은 다음과 같다. 1. 현량과 실시: 조광조는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시와 문학 중심의 과거제도와는 달리 유교 경전을 중시하여 천거에 의해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인 현량과를 실시하여 신진사류 28명을 요직에 배치한다. 2. 향약 보급: 조광조는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지방 자치와 도덕적 교화를 강화하려고 한다. 3. 소격서 폐지: 조광조는 도교와 관련된 소격서를 폐지하여 유교적 이념을 강화하고자 한다. 4. 위훈 삭제: 조광조는 공신들의 위훈을 삭제하여 훈구 세력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하여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면이 있어 보수적인 훈구 세력의 반발을 샀고, 도학정치를 내세워 임금에게도 압박을 가하자 중종도 염증을 느낀다. 결국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 기묘사화

현량과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여 발판을 마련한 조광조 일파는 마침내 1519년 본격적인 훈신 제거작업인 반정공신 위훈삭제를 주장하며 성희안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 책록 되었다며, 유자광은 권력과 부귀를 위하여 반정하여 소인배라고 집중 비난한다. 그러자 중종은 반정 공신은 이미 한번 정하였으니 수정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끝없이 설득한다. 이에 중종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 결과 전체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위훈이 삭탈될 지경에 놓이게 된다. 중종의 마음을 잘 읽고 있었던 훈구세력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후궁 경빈박씨 등을 이용하여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을 써서 벌레가 갉아먹도록 한 다음 중종에게 바치게 한다. 이는 '조(趙)씨 즉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뜻이었다.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던 중종은 매우 불쾌해한다. 얼마 후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밤에 은밀히 중종을 만나 조광조가 붕당을 조성하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한다. 그 결과 조광조, 김식, 윤자임, 박훈 등이 투옥된다. 남곤, 홍경주 등 훈구세력들은 당장 처벌 할 것을 요구하자 이장곤, 안당, 정광필 등이 반대한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 천여 명이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한다. 결국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사사되고, 훈구파인 김전, 남곤, 이유청 등은 사사되고, 김정, 기준, 김식 등은 귀양 갔다가 죽고, 김구 박세희 홍언필 등 수십 명은 귀양을 간다. 1519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 한다. 당시 중종 때의 정치체제는 왕도정치를 실현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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