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9대 국왕 성종(1457 ~ 1494)의 이름은 혈(娎)로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며 어머니는 소혜왕후 한씨이다. 성종실록은 총 297권 150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469년 11월부터 1494년 12월까지 25년 1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원명은 '성종강정대왕실록'이다. 실록의 편찬은 성종사후 4개월 뒤 1495년 4월 춘추관에 실록청을 두고 편찬을 시작한다. 실록에는 김일손의 '사초'와 단종을 추모하고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김종직의 '조의제문', 이극돈이 정희왕후 상중 기생과 놀아난 것을 비난한 김종직의 '화술주시'가 실려있어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다. 실록은 4년 6개월 만인 1499년 3월에 완성되어 네 곳의 사고에 보관된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성종의 가족들과 폐비윤씨사건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성종의 가족들
성종은 38년 평생 정비 공혜왕후를 포함한 12명의 부인과 16남 12녀의 자식을 둔다. 공혜왕후 한씨는 17세의 나이로 자식이 없이 사망한다. 폐비 윤씨에게 1남(연산군), 정현왕후 윤씨에게 1남 1녀(진성대군(중종), 신숙공주), 명빈 김씨에게 1남(무산군), 귀인 정씨에게 2남 1녀(안양, 봉안군, 정혜옹주), 귀인 권씨에게 1남(전성군), 귀인 엄씨에게 1녀(공신옹주), 숙의 하씨에게 1남(계성군), 숙의 홍씨에게 7남 3녀(완원, 회산, 진성, 익양, 경명, 운천, 양원군, 혜숙, 정순, 정숙옹주), 숙의 김씨에게 3녀(휘숙, 경숙, 휘정옹주), 숙용 심씨에게 2남 2녀(이성, 영산군, 경순, 숙혜옹주), 숙용 권씨에게 1녀(경휘옹주)를 낳는다.
·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1437 ~ 1504)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덕종)의 비인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로 의경세자가 사가에 있을 때 결혼을 하였으며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나 의경세자가 20세에 요절함에 따라 왕비가 되지 못하고 사가에 머무른다. 1469년 11월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의 결탁으로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이 되자, 의경세자는 덕종이 되고 자신은 왕비가 되어 인수대비에 책봉된다. 그녀는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고 불경을 언해하고 부녀자의 도리를 적은 <내훈>을 간행하기도 한다. 성종이 여자를 좋아해 규방 출입이 잦자 성종의 계비 윤씨가 이를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킨다. 나중에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윤씨사건'에 연루된 사람을 박해하려 하자 이를 꾸짖고 만류하기도 한다.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이 머리로 받았으며, 며칠 뒤 인수대비는 6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무덤은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 공혜왕후 한씨(1456 ~ 1474)
성종의 첫 번째 부인인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둘째 딸로 예종의 정비인 장순왕후 한씨는 그녀의 친언니이다. 1467년 12세의 나이로 한 살 어린 자산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자산군이 왕이 되자 그녀는 왕비가 된다. 1474년 19세의 나이로 자식이 없이 사망하자 공혜왕후로 추증된다. 그녀의 능은 순릉이며 경기도 파주에 소재하고 있다.
· 폐비 윤씨(? ~ 1482) 사건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로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1473년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봉해지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가 사망하자 왕비로 책봉된다. 그해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와 질투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한다. 1477년 극약인 비상을 숨겨 왕과 후궁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된다. 당시 성종후기에는 태평성대로 약간 퇴폐적인 사회 분위기도 있었다. 야사에 나오는 성종과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1479년에는 성종 자신도 유흥에 빠져 규방에 자주 출입하자, 왕비 윤씨는 이를 투기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다. 이 일로 대신들은 세자의 친모라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성종과 인수대비의 분노를 사게 되어 폐비되고 만다. 윤씨는 친정으로 쫓겨난 뒤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낸다. 1482년 장차 왕이 될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되며 조정에서 따로 거처를 마련하고 생활비를 주어야 한다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러나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세 번째 부인 정현왕후의 반발도 심해 성종도 폐비의 거처를 마련할 수 없었다.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성종은 폐비 윤씨에 동정심이 생겨 내시와 궁녀를 시켜 동정을 살펴오라고 보내자 이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고 거짓 보고를 한다. 성종은 이 말을 믿고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하고, 그녀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고 묘비명만 '윤씨지묘'로 하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그리고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를 논하지 말라고 유명을 남긴다. 그 후 연산군은 즉위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임사홍을 통해 '폐비윤씨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고 그녀의 묘를 개장한다. 1504년에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보복과 왕권 강화를 위해 갑자사화(甲子士禍)라는 대규모 숙청 사건을 일으킨다.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를 포함하여 이극균, 윤필상, 성준 등 많은 신하들이 처형되고, 이미 사망한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등은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연좌제로 그들의 자녀와 가족들까지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연산군은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에 추숭하고 묘도 회릉으로 개칭한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폐위되고, 윤씨의 관작도 추탈되고 다시는 신원되지 못하였다.
· 정현왕후 윤씨(자순대비 1462 ~ 1530)
성종의 세 번째 부인으로 우의정 윤호의 딸로 중종의 친어머니이다. 그녀는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으며,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폐비가 되자 왕비로 책봉된다. 1497년 자순대비로 봉해지고, 1530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녀의 능은 선릉으로 성종의 묘와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소재하고 있다.
성종의 사망
성종은 1494년 38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다리에 생긴 종기가 급격하게 악화되어 폐병과 피부병 합병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능은 선릉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모셔져 있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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