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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7대 세조실록 2 - 세조 가족과 도운 사람들 정희왕후 권람 한명회 신숙주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7. 29.

조선의 제7대 국왕 세조(1417 ~ 1468)의 이름은 이유(李瑈)로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세조실록은 총 48권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455년 윤 6월부터 1468년 9월까지 13년 3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원명은 '세조혜장대왕실록'으로 부록에 종묘, 제례에 쓰는 악보가 수록된 점이 특징이다. 실록의 편찬을 1469년 4월(예종 1년)에 시작하여 2년 만인 1471년 12월(성종 2년)에 실록이 완성된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세조의 가족들과 세조를 도운 사람들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세조2

 

세조의 가족들

세조는 39세에 왕위에 오른 탓으로 후궁이 많이 없어 자식이 많지 않았다. 세조는 2명의 부인 사이에 4남 1녀의 자식을 가진다. 정의왕후 윤씨에게서 2남 1녀(의경세자(덕종), 해양대군(예종), 의숙공주)를 가지고, 근빈 박씨에게서 2남(덕원군, 창원군)을 가진다. 

 

· 정희왕후 윤씨(1418 ~ 1483)

정희왕후 윤씨는 판중추부사 윤빈의 딸로 1428년 가례를 하여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된다. 그녀는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로 계유정난 당시 수양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결행에 나서게 하였다. 1468년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그녀는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넘겨주지 않고, 덕종의 큰 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둘째 아들 13세 자을산군(성종)을 그날로 즉위시켜 7년 동안 섭정을 한다. 그녀는 섭정기간 동안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성품으로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마치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녀는 1483년 3월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광릉으로 세조의 능 동편 언덕에 모셔져 있다. 

 

· 의경세자(덕종 1438 ~ 1457)

세조의 장남이며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이름은 장, 자는 원명이다. 1445년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세조 왕위에 오르자 세자로 책봉된다. 한확의 딸 소혜왕후 한씨를 아내로 맞아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성종)을 낳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예절이 발랐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일찍 20세에 요절한다. 의경세자도 아버지 세조와 마찬가지로 죽기 전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의 귀신에 시달렸으며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의 관을 파낸다. 나중에 의경세자는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된다. 그의 능은 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소재하고 있다. 

 

 

세조를 도운 사람들

세조의 정치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왕도정치와는 거리가 먼 왕권 안정을 위한 정치, 즉 무단강권정치이다. 그는 계유정난을 일으킨 정난공신들을 위주로 한 측근정치를 시행한다. 이러한 정난공신 세력에는 권람, 한명회를 중심으로 하여 수양대군을 왕으로 옹립하여 정권을 잡을 목적으로 계유정난을 직접 일으킨 '세조의 심복세력'과 정인지, 신숙주, 최항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계유정난의 대의명분을 설정해 준 '집현전 학사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 왼팔 권람(1416 ~ 1465)

권람은 권근의 손자이자 권제의 아들이며 한명회와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그는 문장에 능하고 호탕한 성품으로 활쏘기를 잘하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청년시절 아버지 권제가 첩에 빠져 어머니를 내쫓자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을 유람하다가 한명회를 만나 권력을 꿈꾸게 된다. 1450년 35세의 나이로 향시와 회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전시에서는 4등이 이었으나 장원한 김의정의 출신이 미천하여 장원이 된다. 그 후 사헌부감찰을 거쳐 집현전 교리일 때 수양과 함께 <역대병요>의 음주를 편찬하다가 가까워진다.  그는 단종이 등극한 후 김종서, 황보인 등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 불만을 품고 동지를 찾고 있는 수양대군을 가장 먼저 찾아가 거사를 도모하고 한명회를 수양에게 소개한다. 그 후 수양의 부탁으로 양정, 홍달손, 유수 유하 등 무사들을 규합하여 수양과 함께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정난에 성공하자 정난 1등 공신으로 집현전 교리에서 일약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으며, 다음 해 2월 부승지에서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제수된다. 그 후 이조판서를 거쳐 1458년 신숙주와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고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에는 좌의정이 된다. 1463년 병을 핑계로 관직을 물려나 병으로 고생하다가 1465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 책사 한명회(1415 ~ 1487)

한명회는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받아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로 호는 '압구정', '사우당'이며, 별명은'칠삭둥이'이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어서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내다가 번번이 과거에 실패하여 38세가 되던 1452년 겨우 문음으로 하급관리인 경덕궁직이 된다. 그는 모사에 능하고 책략에 뛰어나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친구 권람을 시켜 수양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하게 한다. 그 후 권람의 천거로 수양의 책사가 되어 경덕궁직에 있던 무사 홍달손, 홍윤성, 양정 등 30여 명을 천거하는 등 병력을 모은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 때 수양에게 대의명분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으며, '살생부'를 만들어 자신이 끌어들인 홍달손 등의 무사로 하여금 김종서를 살해하게 한 후 황보인 등 조정대신을 궁궐로 불러들여 살육한다. 정난이 성공하자 정난 1등 공신으로 1455년 세조가 즉위 후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며, 1456년 성삼문 등 집현전학사들의 단종복위운동을 막은 공으로 좌승지를 거쳐 승정원 수장인 도승지가 된다. 그 후 이조판서, 병조판서, 4도 체찰사를 거쳐 1463년 좌의정, 1466년 영의정에 오른다. 그는 일개 궁직에 불과하였던 자가 13년 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의 최고인 영의정이 된 것이다. 그는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 비, 다른 딸을 성종 비로 만들어 2대에 걸쳐 왕후가 되게 한다. 그리고 신숙주와 인척관계를 만들고, 권람과도 사돈이 된다. 그러나 1466년 영의정이 되었을 때 함길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시애는 "한명회, 신숙주가 함길도 절제사 강효문과 짜고 반란을 도모하려 하기에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일어난다."라는 거짓 보고문을 세조에게 올린다. 이 일로 인해 세조는 보고문을 믿고 한명회와 신숙주를 하옥하고 진상을 조사한 후 혐의가 풀리자 석방한다.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는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유언으로 원상으로 정사를 결재하다가 1469년 예종 1년 영의정에 복귀한다. 그해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도 같이 겸임한다. 한명회는 세조, 예종, 성종까지 온갖 고관요직을 두루 거치며 부귀영화를 누린다. 특히 노년에도 부원군의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다가 1487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은 후 연산군이 즉위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나는데 이때 연산군 생모인 폐비윤씨 사건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로 부관참시(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를 당하게 되었으나 중종 때 신원된다. 

 

· 오른팔 신숙주(1417 ~ 1475)

신숙주는 세조와 나이가 같으며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의 아들로 호는 보한재이다. 그는 일찍 관직에 나가 22세에 사마양시, 생원, 진사시 등에 합격하여 전농시직장이 된다. 그 후 집현전에서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을 정리한다. 1447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가 되었으며 시 짓기도 뛰어나 명나라 사신 예겸으로부터 동방거벽(동방에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사헌부 장령을 거쳐 직제학에 오른다. 그는 1452년 수양과 함께 명나라 사은사로 갔다 온 후 급격히 가까워져 간접적으로 수양의 거사를 지원한다. 1453년 10월 계유정난에는 김종서 등의 경계를 받아 외직에 나가 있었다. 정난이 성공하여 세조가 정권을 잡자 신숙주는 정난공신 1등으로 도승지에 오른다. 그 후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수양에게 보고한다. 1455년 수양이 즉위하자 예문관대제학이 되었으며, 주문사로 명의 고명을 받아와 세조가 공식적인 조선의 제7대 왕이 되게 한다. 이후 병조판서, 좌찬성을 거쳐 1462년 그의 나의 46세에 영의정에 제수된다. 그 후 너무 지위가 높아진 것을 걱정하여 1464년 영의정을 사직한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와 함께 원상이 되어 모든 정사를 결재하고 예종이 죽자 세조의 비 정희왕후에게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왕으로 추대해 왕위를 잇게 한다. 그 후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어 있다가 노환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다가 1475년 5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신숙주는 당대에서는 '대의에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로 평가되었으나, 후대 중종 때 사림파들은 그를 '기회에 능한 변절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상문은 1차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할 때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지만 죄가 무거워 죽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할 만큼 신숙주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래도 신숙주는 조선에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왕들의 문화통치를 위한 귀감이 되는 책 <국조보감>,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편찬하고, 훈민정음 확산을 위해 각종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외교와 국방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서예에도 뛰어나 송설체의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의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거> 등 많은 작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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