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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6대 단종실록 - 황표정사 계유정난 이징옥의 난 단종복위운동 노산군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7. 28.

조선의 제6대 국왕 단종(1441 ~ 1457)의 이름은 홍위로 문종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이다. 단종실록은 총 14권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452년 5월부터 1455년 윤 6월까지 3년 2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로 표지에는 '단종대왕실록'이라고 되어있으나 본문 표제에는 '노산군일기'이다. 실록의 편찬은 1455년 8월 춘추관의 건의로 '노산군 즉위 이후의 시정기를 편찬하기로 하였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과정이나 참여한 인물에 대한 기록은 없다. '노산군'이라는 이름은 숙종 24년 1698년에 이르러서야 '단종실록'이라고 수정되어 표제에 붙여지게 된다. 

 

비운의 왕자 홍위

· 출생과 어머니의 죽음

문종은 문약하여 후사가 많지 않았다. 어머니인 세자빈 권씨도 몸이 약하여 난산으로 인하여 외아들 홍위를 낳은 지 3일 만에 사망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동시에 아들의 서조모가 되는 혜빈 양씨에게 양육을 부탁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혜빈 양씨는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하며 정성을 다해 홍위를 키운다. 이렇게 자란 홍위는 여덟 살이 되던 1448년(세종 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홍위를 무척 총애하는 세종은 자신과 세자 향(문종)이 오래 살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집현전의 학자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을 불러 은밀히 세손의 미래를 부탁한다. 왜냐하면 세종은 혈기왕성하고 야심이 많은 자신의 아들인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단종의 즉위와 수양대군

· 단종의 즉위

1450년 2월 세종이 죽자 아버지 세자 향은 왕이 되어 문종이 되고, 10살인 홍위는 세손에서 세자가 된다. 아버지 문종이 병세가 더 심해져 즉위 2년 3개월 만에 세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한다. 1452년 5월, 나이가 12세인 홍위가 조선 제6대 임금(단종, 노산군)에 등극하게 된다. 단종은 대왕대비,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 왕비도 없어 수렴청정조차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즉위를 하게 된 것이다. 

 

· 의정부의 권력집중 

단종이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으므로 모든 업무는 의정부와 육조가 맡아 처리하고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만 하였다. 그리고 인사문제에서는 황표정사 제도를 사용하였는 데 이는 신하들이 인사 대상자 이름 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낙점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모든 정치권력은 의정부의 영의정 황보 인, 좌의정 김종서 등에 집중되었으며, 왕권은 약화되어 유명무실하게 된다. 재상중심의 유교정치를 주장하는 성상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도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증대에 대하여 비판하기도 한다. 한편 세종의 아들들인 왕족들이 세력을 팽창하여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특히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 사이의 세력다툼은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계유정난

· 배경 및 경과

문종이 사망하고 왕이 너무 어려서 왕권이 유명무실하게 되고 실질적인 왕실 어른이 없어지자, 단종은 왕족 대표로 수양대군과, 금성대군에게 자신을 보필해 줄 것을 부탁한다. 수양은 직계혈족으로 최고 어른이고 금성은 수양의 동생이지만 일찍이 태조의 아들 방석의 봉사손이여서 선택된 것이다. 금성은 성격이 곧고 정권욕이 없어 추종하는 세력이 없었으나, 수양은 왕권 강화를 추구하며 성격이 강직하고 권력에 욕심이 있는 인물로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에 뛰어든다. 그러자 황표제도를 이용하여 조종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은 정치적인 대의명분을 얻고 수양을 견제하며 왕족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안평대군을 선택한다. 고명대신과 안평이 손을 잡자 수양은 힘과 대의명분까지 잃게된다. 수양대군은 무력으로 이들을 제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들어간다. 1952년 7월 집현전 교리인 권람을 끌어들이고 그후 한명회홍윤성을 심복으로 삼는다. 그해 9월 자청하여 명나라 고명 사은사로 감으로써 '자신이 정권에 대한 야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여 김종서 등 반대 세력을 안심시킨다. 1453년 4월 명에서 돌아온 수양은 신숙주를 끌어들이고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들을 양성한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마침내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으로 '안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어지럽힌다'는 죄명으로 살생부를 만든다. 수양은 먼저 홍달손 등을 이끌고 병권을 쥐고 있는 우의정 김종서를 철퇴로 때려죽이고, 이어서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한 대신들을 차례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한다. 

 

· 결과

계유정난으로 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손에 들어간다.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라 왕을 대신해 모든 서무를 관장하는 등 신권과 왕권을 동시에 장악한다. 그리고 거사에 참여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 등 43명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안평대군을 붕당의 수괴로 지목하여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하고, 우직은 다시 진도로 유배시킨다. 1454년 1월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다. 이듬해인 1455년 윤 6월 수양대군이 동생 금성대군과 여러 종친, 궁인, 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를 보낸다. 

· 이징옥의 난

이징옥은 뛰어난 무장으로서 경원절제사, 영북진절제사, 함길도 도절제사 등의 관직에서 근무하며 4군과 6진의 개척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죽이고, 이어 이징옥을 김종서의 일당으로 몰아 자신을 파면한다. 이에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은 분개하여 신임 절제사로 부임한 박호문을 참살하고 북쪽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라 칭하고 도읍을 '오국성'에 정하고 여진족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종성부사 정종과 호군 이행검 등에게 살해되어 실패로 돌아간다. 이징옥의 난은 조선왕조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이며, 중앙정부로부터 지역 주민에 대한 차별을 가져와 민심을 자극해 후일 이시애의 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단종복위운동

· 1차 단종복위운동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세조 즉위 4개월 만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역모로 보는 집현전 학사인 성상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문관들과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들이 주동이 되어 상왕이 된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세조가 명나라 책명사를 맞이하러 창덕궁으로 가면 별운검인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조가 별운검을 동반하고 창덕궁 연회장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한명회의 건의로 암살계획은 뒤로 연기된다. 이때 암살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에게 이 사실을 알려 결국 모두 잡혀 처형을 당하게 된다. 그 후 중종 때 사림파들은 단종을 위해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박팽년, 성상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은 사육신으로, 세조에게 벼슬을 하지 않고 살아서 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은 생육신으로 높히 칭송한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가게 된다.

 

· 2차 단종복위운동

수양의 친동생이며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수양이 단종을 상왕으로 몰아충ㅈ내자 이에 항의하다가 유배를 당하게 된다. 1457년 9월 유배지에서 금성은 순흥부사 이보흠을 만나 단종 복위 계획을 모의하다가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반역죄로 처형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어, 한 달 뒤 세조의 사약을 받아 사망하게 된다. 그 외에도 계유정난 직후 이징옥의 난, 세조 집권 후 생육신들을 비롯한 유생들이 왕위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것 등은 단종복위운동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족들과 사망

· 사망

1455년 윤 6월 금성대군과 많은 신하들이 유배를 당하자 생명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수강궁으로 옮겨간다. 그 후 단종은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인 1차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어 지낸다. 1457년에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2차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자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 된다. 한 달 뒤인 1457년 10월 24일에 17세의 나이로 숙부인 세조의 사약을 받아 사망하게 된다. 

 

· 가족들

단종의 부인은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단종은 1681년 숙종 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 되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된다. 그의 능은 장릉으로 강원도 영월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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