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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4대 세종실록 3 - 세종시대를 빛낸 사람들 황희 맹사성 장영실 박연 정초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7. 27.

조선의 제4대 국왕 세종(1397 ~ 1450) 충녕대군의 이름은 도(祹)이고 자는 원정(元正)으로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다. 세종실록은 총 163권 154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418년 8월부터 1450년 2월까지 31년 6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로 원명은 '세종장헌대왕실록'이다. 실록의 편찬은 세종이 죽자 김종서, 황보 인, 정인지가 1452년 시작하여 편찬도중 김종서, 황보 인이 계유정난으로 피살되자 정인지 혼자 감수하여 완성한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지면 부족으로 못하였던 세종의 시대를 빛낸 사람들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308세종

 

시대를 빛낸 사람들  

· 명재상 황희와 맹사성

황희(1363 ~ 1452)와 맹사성(1360 ~ 1438)은 둘 다 뛰어난 선비이며 명재상으로 청백리이다. 황희는 개성에서 태어나 1389년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성균관학록에 제수된다. 이에 황희보다 나이가 3살 위인 맹사성은 1386년 27세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도 3년 먼저 오른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황희는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를 하였지만 조정의 요청으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태조와 태종의 신임을 받는다. 태종은 "황희는 공신이 아니지만 공신으로 대접하였고, 하루도 보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 접견을 하였다."라고 할 정도로 그를 신임하였다. 태종시절에 황희는 이조판서에 오른다. 한편 맹사성은 태조로부터 예조의랑 직을 제수받아 승진을 거듭하여 1408년에는 사헌부 수장 대사헌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황희와 맹사성 둘 다 신임이 두터운데도 불구하고 한 번씩은 파직을 당하여 고통을 받게 된다. 맹사성이 사헌부 대사헌일 때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부마인 조대림을 고문하여 왕족을 능멸하다는 죄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된다. 당시 영의정 성석린과 황희 등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3년 동안 관직을 떠나게 된다. 한편 황희도 1418년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원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때 맹사성은 공조판서로 있었다. 1422년 황희가 유배에서 풀려나 참찬으로 다시 등용되었을 때에는 맹사성은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찬성사가 되어 근무한다. 1432년 황희는 영의정부사로 맹사성은 좌의정을 맡는다. 이때는 세종이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바꾼 지 10년이 지난 때여서 조선은 재상위주의 내각정치가 틀이 잡힌 시기였다. 황희와 맹사성은 관리의 기강을 잡고 의견을 조정하며 유교적 정치이념을 펼쳐 나간다. 

 

황희와 맹사성의 성품은 서로 달랐다. 황희는 분명하고 정확하고 강직하여 학자적인 인물로 병조, 이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일에 능하였다. 반면에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하여 예술가적인 인물로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하였다. 세종은 재상중심의 유교적 왕도정치를 실현하는데 정확성이 필요할 때에는 황희에게 맡기고, 부드러움이 요구될 때에는 맹사성에게 맡긴다. 따라서 황희에게 변방의 안정을 위하여 4군 6진을 설치하고, 외교와 문물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지휘 감독을 맡기다. 그리고 맹사성에게는 악공을 교육하거나, 과거 시험 감독관으로 응시자들의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맡긴다. 둘 다 청렴하여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맡은 일을 처리한다. 그 결과 세종은 성종시대와 더불어 조선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안정된 번영의 시대를 만들게 된다.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황화와 맹사성은 두 사람 중 맹사성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맹사성은 만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지내다가 1438년 79세의 나이로 온양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그는 평소 소를 타고 다니며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를 좋아하고, 소탈하여 손님이 오면 상석을 내주며, 효성이 지극해 늙은 부모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어 놓았지만 세종은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다. 한편 황희는 조선의 재상들 중에 가장 장수한 사람으로 1449년 87세의 나이로 물러날 때 영의정으로 있었다. 그는 맹사성이 죽고 난 이후 14년을 더 살다가 1452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청렴하고 사리에 밝고 치밀한 사람이며 성품이 너그러워 노비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 과학혁명의 장영실

장영실은 중국상인 출신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동래현에서 관노로 생활하던 중 재주가 출중하여 세종에게 천거되어 발탁된다. 세종은 과학 발전을 위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모으고 있었으며, 장영실을 중국으로 견문유학을 보낸다. 장영실은 유학에서 천문기기에 대해 배우고 귀국하여 궁중 기술자로 활동한다. 세종 5년에는 노비에서 면천이 되어 상의원별좌라는 직책을 받는다.

 

그는 가장 먼저 물시계를 만들어 정 5품에 올랐으며 세종 14년 천문관측기인 간의대 조성사업을 추진한다. 간의대에 혼천의, 혼상, 별자리표, 방위지정표 등을 설치한다. 그리고 당대의 최고의 과학결정체로 천문관측기인 혼천의를 만들어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한다. 그리고 지동설의 원리를 깨치고 태양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만든다. 그러나 앙부일구는 태양이 있을 때에만 시간을 알 수 있다는 단점을 보완하여 태양이 없어도 스스로 종을 치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어 낸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대호군으로 승진한다. 그 후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어 궁중에 바치고, 세종의 명을 받아 활판 인쇄술에도 관여하여 이천, 이순지 등과 함께 조선시대 활판인쇄술의 자랑인 금속활자인 갑인자와 그 인쇄기를 완성한다. 이와 같이 장영실은 세종 시대의 찬란한 과학 혁명을 이끌어 낸 선구자이며 과학자였다. 

 

· 음악의 귀재 박연

박연은 태종 때 이조판서 박천석의 아들로 137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34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집현전 교리를 지내며 주로 사헌부에서 근무한다. 그 후 봉상판관 시절에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악학별좌를 겸한다. 세종은 왕자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아 박연과 가까이 지낸다. 유교에서는 예와 악을 중요시하므로 의례에서 음악은 필수이다. 따라서 세종은 의례를 정리하기 위해 음악의 체계를 정리하고자 한다. 조선의 음악은 좌방과 우방으로 나누어지는데 좌방인 궁중 음악인 아악과 우방인 민속음악인 향악당악이 있다. 박연은 아악을 정리하고 아악과 향악의 조화로운 결합을 시도한다. 율관을 제작하는 과정에 박연은 편경과 편종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그 후 세종과 함께 <보태평>, <정대업> 등 향악을 만들기도 하여 궁중음악에 중국 것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의 음악을 사용하게 한다. 그 결과 조선의 악기는 자체 생산이 가능하게 하고, 독자적인 음악을 만들어 조선의 음악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려 민족음악의 기틀을 다지게 하였다. 나이가 들어 박연은 고향 영동에 내려가 향악 발전에 노력하다가 1458년 8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 <농사직설>의 정초

세종 시대의 번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농업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경제적 안정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실용적인 이론서에는 <칠정산내·외편>과 <농사직설>이 있다. <농사직설>은 '정초'라는 개인이 집필한 최초이자 최고의 실용 농학서이다. 정초는 <농사직설> 이외에도 음악서인 <회례문무악장>,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지었다. 정초와 정인지 등이 중심이 되어 지은 <칠정산내·외편>이 없었다면 장영실의 천체에 대한 연구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칠정산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 <칠정산외편>은 회회력에 대한 해설서로 <칠정산내·외편>은 태양과 지구, 우주의 움직임에 대한 천체력이었다. 따라서 장영실은 정초의 지도로 이 책에 나온 기술들을 응용하여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제작할 수 있었다. 

 

한편 정초는 변호문의 도움을 받아 <농사직설>을 쓴다. 과거부터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 <사시찬요>와 우리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이 있었지만 농업 방식이 떨어지고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 실용적이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여 곡식 재배에 중점을 두고 수리, 기상, 지세 등의 환경 조건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환경에 따라 재배하는 작물의 종류와 실제 농민들의 재배법과 경험담을 기술하여 저술한 실용적인 농사서<농사직설>이다. 그 후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에 정초의 농사법이 인용되기도 한다. 정초는 "풍토가 다르면 농사법도 달라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조선 후기 실학자에 많은 영향을 끼친 중농주의 실학의 선구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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