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4대 국왕 세종(1397 ~ 1450) 충녕대군의 이름은 도(祹)이고 자는 원정(元正)으로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다. 세종실록은 총 163권 154 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418년 8월부터 1450년 2월까지 31년 6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로 원명은 '세종장헌대왕실록'이다. 실록의 편찬은 세종이 죽자 김종서, 황보 인, 정인지가 1452년 시작하여 편찬도중 김종서, 황보 인이 계유정난으로 피살되자 정인지 혼자 감수하여 완성한다. 간행된 세종실록은 처음에는 양이 방대하여 춘추관에 한 부만 두었다가, 그 후 3부를 더 찍어 충주, 전주, 성주 사고에 봉안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만 남고 모두 소실된다. 전주 사고본을 바탕으로 다시 총 5부를 만들어 춘추관, 마니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에 보관한다. 이괄의 난, 병자호란으로 일부 파괴되자 다시 복구하여 인조 이후에는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에 보관되어 온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때 태백산본을 기본으로 영인본을 만들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선위파동과 세종의 등극
· 태종의 선위 파동
태종은 재위 약 18년 동안 4번이나 선위 파동을 일으킨다. 제1차 선위 파동은 '민무구 형제의 옥'으로 1406년에 일어나는데 이때 태종의 나이는 40세도 안된 나이였으며, 양녕의 나이는 13세이었다. 민무구 형제가 어린 양녕을 포섭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하였다는 탄핵사건으로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 민무구 형제의 옥이 발생하자 태종은 선위를 뒤로 미룬다. 그 후에도 태종은 세 번이나 더 선위를 표명한다. 이는 태종이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로 양녕을 믿지 못하고 벌인 것이라고 추정된다. 양녕은 궁궐에 적응하지 못하고 빠져나가 풍류를 즐기는데 반하여 충녕은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에 열중하며 정치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야사에서는 아버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양녕은 의도적으로 나쁜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분노를 일으켰다고도 한다. 아무튼 양녕은 처음 스승을 만날 때 개 짖는 시늉을 하고, 공부시간에 새 덫을 만들어 새를 잡고,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지 않고 꾀병을 부르고, 궁궐의 담을 넘어 기생을 찾아가고, 남의 소실을 낚아채어 희롱을 하는 등 미치광이 짓을 한다.
· 세종의 등극
결국 1418년 제4차 선위 파동으로 '양녕의 폐세자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태종이 양녕이 아닌 충녕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신하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양녕은 왕세자로 책봉된 지 14년 만에 폐위되고 셋째 아들 충녕(세종)이 왕세자로 책봉된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1418년 8월 태종은 충녕에게 양위하니 그가 바로 조선 제4대 왕 세종이다.
세종의 업적
세종은 태조이 이룩하여 놓은 왕권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한 단계 도약 발전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게 된다. 세종 대에는 개국공신들이 거의 사라지고 과거를 통해 집현전 출신의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유교정치에 기반을 둔 유학자와 군왕이 만나 신권과 왕권이 조화를 이루는 유교적 왕도정치를 실현한다. 그리고 강력한 왕권중심의 육조직계 체제에서 의정부 서사제로 이행한다. 이에는 세종이 젊을 때부터 앓아왔던 소갈증(당뇨병)으로 업무가 과다한 육조직계 체제는 체력이 따라가지 못하였던 것도 한몫한다.
· 훈민정음 창제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1443년에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직접 창제한다. 이는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인 한글로 발전하였다. 훈민정음 창제의 정신은 1. 자주정신(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으니), 2. 애민정신(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더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3. 창조정신(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4. 실용정신(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에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자음 창제 원리 :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기본자 5개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상형의 원리'라고 부른다. 그 후, 기본자에 획을 더하여 9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가획의 원리'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획을 더하여 만들어졌지만 획이 더해짐에 따라 소리가 세지는 가획의 원리에 따르지 않고 예외적으로 3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이체자의 원리'라고 한다. 2. 모음 창제 원리 : 모음은 하늘, 땅, 사람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습니다. 이는 '상형의 원리'라고 부른다. 그 후, 모음 기본자 간 1번의 결합이 이루어진 ㅗ, ㅜ, ㅓ, ㅏ를 초출자, 초출자에 하나의 ㆍ(아래아)가 더 결합한 ㅛ, ㅠ, ㅕ, ㅑ를 재출자라고 한다. 이는 '합성의 원리'라고 부른다.
· 과학 기술 발전
세종은 과학 기술에 두루 관심을 기울여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과 두 곳의 간의대를 설치하여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게 한다. 그리고 천체관측기구인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등의 발명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 또한 세종은 출신성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과학자들을 발굴 후원하여 과학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농학, 의학, 인쇄술, 화기제작, 성의 축성, 병선의 개량 등을 연구 개발하여 국방에도 신경을 쓴다.
· 국방력 강화와 영토 확장
세종은 1419년에 이종무 장군을 삼군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함선 227척과 병력 17,000여 명의 정벌군을 이끌고 거제도를 출발하여 왜구를 대파하고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여 왜구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한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국방에 있어서는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그 후 세종은 1433년에 최윤덕 장군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약 1만 5천 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서북 4군(여연, 무창, 자성, 유예)이 설치한다. 또 같은 해 김종서 장군을 함길도 지방으로 보내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6진(온성, 경원, 경흥, 부령, 회령, 종성)이 설치한다. 이로써 여진족을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정하여 북방 영토를 확장하였다.
· 문화 예술과 경제 발전
세종은 집현전의 기능을 확대 개편하여 많은 인재 양성과 새로운 문화 정착에 목적을 두고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한다. 또한 박연을 등용하여 아악을 정리케 한다. 그리고 금속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유통과 경제에 도움을 준다.
· 각종 서적 편찬 사업
집현전 학자들을 활용하여 각종 편찬사업을 펼친다.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실용적인 농업 기술서인 정초의 <농사직설>,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충신, 효자, 열녀들의 이야기를 적은 설순의 <삼강행실도> 등을 편찬한다. 이외에도 의학 기술, 법제, 병서 등 여러 분야의 방대한 책을 편찬한다. 특히 훈민정음에 관한 책으로는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 등이 있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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