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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3대 태종실록 1 - 왕자의 난과 세제 책봉 및 태종의 등극과 개혁정치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7. 25.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1367 ~ 1422)은 정안대군 방원으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이다. 태종실록은 총 36권 16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401년 11월부터 1418년 8월까지 17년 10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로 원명은 '태종공정대왕실록'이다. 실록의 편찬은 태종이 죽자 변계량과 윤회가 1422년 시작하여 편찬도중 변계량이 죽자 황희와 맹사성이 참여하여 1431년에 완성된다.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대한민국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종

 

제2차 왕자의 난과 세제 책봉

· 제2차 왕자의 난과 세제 책봉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2년이 지난 뒤 1400년 1월,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박포가 방원과 사이가 좋지 않고 왕위 계승에 야심을 가진 방간을 찾아가 "방원이 방간을 죽이려고 한다."라는 거짓 밀고를 한다. 그러자 넷째 아들 방간은 박포의 말을 확인도 하지 않고 박포와 함께 사병을 일으켜 이방원에 도전한 사건이다. 이는 비교적 쉽게 진압되어 박포는 사형을 당하고 방간은 체포되어 유배를 당한다. 난이 평정되자 방원의 심복인 하륜이 주청을 하여 정종은 상왕 태조 이성계의 허락을 받아 이방원을 왕위 계승자로 결정된 동생이라는 뜻인 '세제'로 책봉한다. 이 사건을 '제2차 왕자의 난', '박포의 난', '방간의 난'이라 한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의 승리하여 사병이 혁파되고 모든 군대가 국가의 군대로 통합되어 왕권이 강화된다. 

 

· 왕자의 난 이후의 방간

방간의 난이 실패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수차례 간언을 한다. 그러나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를 시키고 심지어 방간이 병에 걸리면 의원을 보내 치료를 하여준다. 방원이 상왕이 된 세종치세에도 방간의 죄가 논의되자 방원(태종)과 세종은 끝까지 거부한다. 방원은 형제인 방간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로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태종의 등극과 개혁정치

· 태종의 등극

정도전 일파들로부터 요동정벌론이 대두되고 우선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나라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이에 위기를 느낀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방석을 제거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다.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세제로 책봉되면서 왕권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키며 의정부와 삼군부를 설치하고 정무와 군정을 분리한다. 또한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가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한다. 마침내 1400년 11월, 방원은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으로 즉위한다. 따라서 정종은 상왕,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된다. 

 

· 개혁정치

1.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제도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노비제도를 정비하며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준다. 2.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능력과 실력위주로 인재를 등용한다. 3. 숭유억불정책을 실시하여 불교와 도참사상을 억제하고 유교를 장려하여 십학을 설치하고 사부학당을 건립한다. 문묘제도를 정비하여 혼례, 복제를 정하였다. 4. 대외정책으로는 명에 대해 예를 갖추어 실리를 추구하고 변방을 안정시킨다. 부산포, 내이포에 도박소를 열어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하고 관리 감독한다. 5. 수도를 다시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호구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고 포백세와 호포세를 폐지한다. 6. 하륜과 권근이 고대사를 정리한 역사서 <동국사략>을 편찬한다. 이러한 개혁정치는 그가 상왕으로 물러나는 1418년까지 계속 이어진다. 

 

· 왕권 이양과 사망

1418년 장자인 양녕대군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세자에서 폐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 왕권을 이양하며 상왕이 된다. 그 후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 박습의 옥을 치죄하고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계속 세종의 왕권안정을 위하여 노력을 하다가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능은 헌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원경왕후와 함께 쌍릉으로 모셔져 있다. 

 

 

태종의 가족들

태종은 56년간 살아오는 중 10명의 부인과 12명의 아들과 17명의 딸을 두었다. 정비 원경왕후 민씨에서 4남 4녀(양녕, 효령, 충녕, 성녕대군), 효빈 김씨에서 1남, 신빈 신씨에서 3남 7녀, 선빈 안씨에서 1남 2녀, 의빈 권씨에서 1녀, 소빈 노씨에서 1녀, 숙의 최씨에서 1남, 덕숙옹주 이씨에서 1남 1녀, 고씨에서 1남, 김씨가 1녀를 두었다. 

 

· 원경왕후 민씨(1365 ~ 1420)

태종의 정비로 여흥 부원군 민제의 딸로 1382년 방원과 결혼을 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 정녕옹주에 봉해진다. 태종보다 두 살이 많은 그녀는 태종의 집권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1398년 8월 민씨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여러 왕자와 같이 태조 이성계의 병을 숙직하던 이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급습 가능성을 알려 준다. 그 정보 덕분에 방원이 먼저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도전 일파가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고 군장비를 모두 불태울 때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의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거사를 성공하게 한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궁녀문제, 태종의 후궁 간택문제에 관여하여 태종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태종은 외척의 권력분산과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가자 민씨는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심기를 건드린다. 결국 민씨의 동생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죽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녀는 왕비에서도 쫓겨나가는 위기에도 닥치게 되나 태종은 자식을 생각해 그녀를 폐비시키지는 않는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녀는 태종과의 사이에 4남 4녀의 자식을 가지게 되는 데 넷째 아들 성녕대군은 14세 때 홍역으로 죽게 된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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