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조선 왕조의 첫 번째 왕인 태조 이성계(1335 ~ 1408)가 살던 시대의 중국은 원나라가 밀려나고 명나라 주원장이 세력을 확대하던 시기이었다. 태조실록은 태조 이성계의 재위 기간 동안의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로 정식 명칭은 '태조강헌대왕실록'이다. 책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7년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편년체로 총 1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종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하여 1413년에 완성되었으나 수정 작업을 거쳐 1448년에 최종 완성된다. 내용은 태조의 즉위와 조선 건국, 초기 정치와 사회 개혁, 왕자의 난 등 중요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 초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성계의 등장
· 출생과 집안
이성계(1335 ~ 1408)는 1335년 고려 동북면 화령(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원나라의 쌍성총관부 만호인 아버지 이자춘의 차남으로 태어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며 궁술에 재능에 뛰어났다.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원의 지방관이 된 이후 증조부 행리, 조부 춘, 아버지 자춘이 원나라의 지방 관리를 지낸다. 후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고조부 이안사는 목조, 증조부 행리는 익조, 조부 춘은 도조, 아버지 자춘은 환조에 추존된다. 아버지 이자춘은 원의 힘이 약해지자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따라 쌍성총관부를 회복하여 1356년 삭방도 만호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으로 돌아온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이자춘이 병사하자 이성계는 아버지 자리를 이어받아 사병을 육성하여 세력을 키우고 동북면을 안정시킨다.
이성계의 활약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전쟁부터 1388년 위화도 회군까지 30여 년 동안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맹장으로 유명하다. 고려 말기에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을 격퇴하며 명성을 쌓았으며, 특히 1380년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쳐 큰 승리를 거둔다.
· 홍건적 격퇴
홍건적은 원나라가 쇠퇴한 틈을 타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1359년에 처음으로 고려를 침입한다. 이에 이성계는 이방실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친다. 1361년에 다시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을 점령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간다. 이때 이성계는 이방실과 함께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개경을 탈환하여 홍건적의 두목을 활로 쏘아 죽이고 홍건적의 장수 백여 명을 처단하는 등 큰 전공을 세운다.
· 원의 장수 나하추 격퇴
쌍성총관부를 빼앗긴 원은 1362년 여진족 장수 나하추에게 군사 수만을 주고 지금의 함경남도인 삼살(북청), 홀면(홍원)을 공격하게 한다. 이에 고려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대적하게 한다. 이성계는 기습공격을 하여 나하추 부대를 섬멸하자 세력이 약해진 나하추는 도망가다 명의 주원장에게 투항한다.
· 원의 덕흥군 부대 격파
그 후 1364년에 원나라 순종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왕으로 세우고 최유, 김용 등 덕흥군 일파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고려를 치게 한다. 이에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 회유하려고 하였으나 기철의 누이인 기황후로 인해 실패하고 최영과 이성계가 합동작전으로 적을 대파하여 막아낸다. 대패한 덕흥군은 겨우 목숨을 건져 원나라로 달아난다.
· 왜구토벌 황산대첩
그 후 이성계는 공민왕의 명을 받아 만주지역인 동녕부를 공격하고, 우왕 2년 1376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공주가 함락되자 군사를 이끌고 왜구토벌을 위해 남으로 와 경상도, 전라도와 지리산에서 크게 물리친다. 그 후 1380년 소년장수 아기바투가 지휘하는 왜구를 최무선의 화약과 화통을 이용한 화포를 사용하여 운봉에서 크게 섬멸한다. 이 전투를 흔히 '황산대첩'이라 한다. 그 후에도 1385년 함주에 나타난 왜구를 섬멸한다.
· 여진족 호바투 섬멸
1382년 여진족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에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자 이성계는 동북면 지휘사가 되어 북으로 올라가 이들을 섬멸한다.
위화도 회군과 고려왕조의 몰락
· 위화도 회군
명나라의 무리한 공물 요구와 동녕부가 있던 철령 이북 땅을 명의 소유로 하려고 하자, 고려 우왕은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여 1388년 2월 요동 정벌을 시작한다. 그해 4월 우왕은 팔도도통사에 최영,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여 요동정벌을 감행한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은 위화도에 도착한 5월은 장마가 시작되어 압록강을 건널 수 없게 된다. 이에 이성계는 요동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사불가론(四不可論)'(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러는 일은 옳지 않다.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3.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다. 4.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를 쓸 수가 없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을 상소한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정벌을 강요한다. 그러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논의하여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하여 개경으로 진격한다.
· 고려왕조의 몰락
결국 쿠데타는 성공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창왕을 옹립한다. 이때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 창을 왕에 옹립하려고 하고, 이성계는 우왕과 창은 신돈의 자손이라 새로운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공민왕의 정비인 안씨의 결정으로 1388년 6월에 9살인 창이 왕이 되고, 조민수는 좌시중, 이성계는 우시중에 올라 정권을 장악한다. 1389년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창왕은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이름하에 창왕이 신씨라서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이유로 그를 폐위시키고 정창군 요창을 옹립하니 그가 마지막 고려의 왕인 공양왕이 된다.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한 우왕과 창왕을 죽인다. 그리고 창왕을 옹립하였던 조민수는 조준에게 탄핵되어 창녕으로 귀양가게 된다.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은 수문하시중 정몽주를 만나 하여가를 읊자,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한다. 그의 마음을 확인한 이방원은 1392년 4월 정몽주를 개경의 선죽교에서 살해한다. 그해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천을 받아 왕으로 등극한다. 이로써 고려 왕실은 34 왕 474년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 후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원주, 간성, 삼척으로 유배되어 떠돌아다니다가 1394년에 처형당한다. 야사에 따르면 이성계 일파는 왕 씨 일가를 모조리 멸족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방을 붙여 모아 강화도로 배를 태워 가다가 수장시킨다. 이때 살아남은 일부 왕 씨들은 성씨를 전(全)씨, 옥(玉)씨, 전(田)씨, 용(龍)씨 등으로 바꿔 숨어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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