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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1대 태조실록 2 - 조선 건국 및 역성혁명론 정도전과 음양도참설 무학대사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7. 24.

태조실록은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재위 기간 동안의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로 정식 명칭은 '태조강헌대왕실록'이다. 책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7년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편년체로 총 1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 지면관계상 못하였던 제1대 태조실록의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태조이성계

 

조선 건국

1392년 7월,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조선을 건국하고 초대 국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무학대사의 건의로 한양에 궁궐을 짓고 1394년 10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다. 정도전과 함께 법전인 <조선경국전>을 편찬하고 숭유억불정책을 펼치고 각종 사회 개혁을 단행하여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한다. 이성계는 74년을 사는 동안 6명의 부인과 8남 5녀의 13명의 자식을 둔다. 그러나 왕위 계승권을 두고 왕자들 사이에 두 차례에 걸친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이성계는 노년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 제1차 왕자의 난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자 마자 권문세가의 딸로 조선개국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둘째부인 계비 강씨 신덕왕후를 총애하여 그녀의 소생 2남 1녀(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그리고 경순공주) 중에 여덟째 아들인 11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세자를 가르치게 한다. 이때 장남 방우는 39세이고, 다섯째 아들 방원은 26세이었다. 이에 조선이 개국되기 1년 전에 55세의 나이로 사망한 첫째 부인 한씨 신의왕후의 소생 6남 2녀(진안대군 방우, 영안대군 방과(정종), 익안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정안대군 방원(태종), 덕안대군 방연 그리고 경신, 경선공주)의 불만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1398년, 태조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태종)이 주도하여 이복동생인 세자 이방석과 일곱 번째 아들 방번을 살해하고, 그를 지지하는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이 사건은 전처 소생과 후처 소생 간의 권력 다툼으로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이방원은 이 난을 통해 조선 초기의 실권을 모두 장악하게 된다. 이에 와병 중인 이성계는 실망하고 그해 9월에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 제2차 왕자의 난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 1400년, 이방원의 넷째 형인 이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일으켜 이방원에 도전한 사건으로 비교적 쉽게 진압되어 박포는 사형을 당하고 방간은 체포되어 유배를 당한다. 방원은 다음 왕위 계승자인 세제의 자리를 확보한다. 이 사건을 '제2차 왕자의 난', '박포의 난', '방간의 난'이라 한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의 승리하여 사병이 혁파되고 모든 군대가 국가의 군대로 통합된다. 이후 이방원은 정종을 이어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으로 즉위하고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된다. 그러자 이성계는 옥새를 넘겨주지 않고 함흥으로 간다. 이에 방원이 차사를 보내 문안 인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활을 쏘아 죽여버린다. 여기에서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인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하게 된다. 2년이 지난 1402년 무학대사의 간청으로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와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게 되어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에 안장되었다. 

 

 

조선 개국을 이끈 사람

· 고려말 혁명가들

고려 공민왕 때 친원파기씨 가문반원파공민왕과의 대립에서 공민왕이 승리하게 된다. 공민왕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최영과 이성계가 있었다. 최영은 왕족을 비롯한 중앙 훈구세력이고, 이성계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개혁론자들의 변방세력으로 늘 전쟁터로 내몰렸다. 위화도 회군으로 개혁론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다시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여 새로운 왕조를 건설해야 한다는 정도전 중심의 역성혁명론자와 고려를 그대로 두고 성리학 사상으로 개혁하자는 정몽주 중심의 고려개혁론자들로 나누어진다. 정도전이나 정몽주 둘 다 이색의 문하로 동문수학하였지만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자들이 승리하게 된다.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세울 생각이 없었으나, 정도전은 사상적으로 무학대사는 인성과 천명론으로 설득하여 마침내 조선이 세워지게 된다. 

 

· 역성혁명론의 정도전

정도전의 고조부 정공미는 고을 아전인 호장으로 있다가 아버지 정운경이 직제학으로 중앙관리에 진출하게 된다. 정도전은 1337년 경북 영주에서 아버지 정운경과 서얼 출신인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다. 따라서 그는 친구들의 따돌림과 차별을 받아 외톨이로 지낸다.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과 친구이었던 관계로 이색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되어 정몽주, 이숭인 등과 동문수학하게 된다. 2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로 지내며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한다. 그 후 그는 1375년(우왕 1년) 권신, 이인임 등 친원세력에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로 유배를 간다. 2년 후 유배에서 풀려나 한양 삼각산 밑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철거당하고 유랑 생활을 하다가 1383년 이성계가 나하추를 격퇴하자 그를 찾아간다.

 

그 후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가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자 밀직부사가 되어 조준과 함께 전제를 개혁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후 정몽주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1391년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한다.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상에 있을 때 정도전은 정몽주 일파에 의해 탄핵되어 다시 유배를 가게 된다. 이에 이방원이 정몽주를 척살하자 정도전은 유배에서 풀려나고 그해 7월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개국한다.

 

그는 스스로 한나라의 고조 유방의 책사 장량에 비유하며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하여 조선을 개국하였다라고 주장한다. 또 역성혁명론에 입각하여 성리학 이념에 바탕을 둔 재상중심의 유교적 왕도정치를 현실에 옮긴다.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법제를 정비하고,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직책을 확립하고,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한다. 그리고 명의 공물 요구가 심해지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혁파 등을 추진하여 병권을 국가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사병혁파에 위기를 느낀 이방원이 사병을 이끌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인 방석을 죽임으로써 좌절되고 만다. 이때가 1398년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가 죽자 후대에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의 권력 찬탈을 미화시키려는 자들로부터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 처세에 능한 모사꾼으로 매도되기도 하였다.  

 

· 음양도참설의 무학대사

무학은 이성계가 군왕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어 조선 개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는 대몽항쟁의 명장 박서의 5대손으로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고려말 왜구에게 끌려가다 탈출하여 안면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파는 하층민이다. 그는 18세에 송광사로 출가하여 용문사 혜명스님에게 불법을 전수받은 스님으로 법명은 자초이다. 무학은 원으로 유학을 하여 인도 출신 고승 지공스님의 선불교를 배웠으며 유학 중인 나옹 혜근스님의 제자가 된다. 무학이 원에서 돌아와 공민왕의 왕사인 나옹을 찾아가나 무학이 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나옹의 제자들의 반대로 토굴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한다. 

 

그 후 무학은 이성계를 만나 새 왕조의 군왕이 될 수 있는 확신과 길을 인도한다. 그는 천문지리음양도참설에 밝고, 파자점해몽술에 뛰어나 그를 찾아온 이성계가 문(問) 자를 짚자 그를 군(君)이라고 말하며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꿈에 서까래 세 개를 가지고 나왔다는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 왕(王) 자라고 말하며 후에 임금이 될 것이라고 확신을 시킨다. 이성계는 무학을 스승으로 대하고, 조선 개국 이후에는 그를 왕사로 모신다. 그는 조선의 왕사로 새로운 왕도를 정하는 일과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여 조선의 안정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성리학자들에 의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게 되자 원망하지 않고 물러나 수행에 전념하다가 1405년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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