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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8대 예종실록 -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및 남이의 역모사건, 제안대군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7. 30.

조선의 제8대 국왕 예종(1450 ~ 1469)의 이름은 해양대군 황(晄)으로, 자는 명조 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희왕후 윤씨이다. 예종실록은 총 8권 5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468년 9월부터 1469년 11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원명은 '예종양도대왕실록'이다. 실록의 편찬을 1471년 12월에 시작하여 6개월 만인 1472년 5월에 실록이 완성된다. 편찬작업은 신숙주와 한명회를 춘추관 영사관으로 하여 최항의 감수 아래 강희맹, 양성지 등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현존하는 예종실록은 전주사고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예종창릉

 

예종과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 예종의 등극

세조의 아들들은 몸이 유약하여 오래 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여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귀신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기도 한다. 세조의 맏아들은 정희왕후의 윤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의경세자로 세조가 즉위하자 1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된다. 왕위 계승 수업을 받던 2년 만인 1457년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따라서 두 번째 아들인 8세 해양대군이 세자로 책봉된다. 그도 역시 몸이 유약하였다. 19세가 되던 1468년 9월 7일 해양대군은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제8대 조선의 왕 예종이 된다. 

 

·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예종은 성년이 되지 않은 데다 몸이 유약하여 원만한 국정운영을 위해 어머니 정희왕후 윤씨의 섭정과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의 원로 중신들로 구성되어 세조가 만든 원상제도의 도움을 받는다. 정희왕후 윤씨는 대담하고 결단력이 강한 인물로 예종의 유약한 성품을 잘 보필하여 주었다. 그러나 1년 2개월간 짧은 기간 동안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왕으로 기록되었으나 당시에도 정희왕후의 힘이 강력하여 세조 시기와 마찬가지로 언관에 대하여 강경하였다. 

 

· 남이의 역모사건

예종이 즉위한 지 한 달 보름 만에 1468년에 '남이의 역모 사건' 또는 '남이의 옥'이라고도 불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로,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아 1457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무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 되고, 건주야인을 토벌한 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거쳐 27세에 병조판서가 된다. 그러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한다. 그들은 강희맹, 한계희 등 훈구대신들의 통해 그가 병조판서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하자, 예종은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이 임명한다. 이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자 남이는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다.”라고 말하는 것을 서얼출신이며 남이를 시기하던 병조참지 유자광이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하려 한다"라고 고변한다. 그 결과 심한 고문을 받던 문효랑이 견디지 못해 역모를 시인하자 남이와 그의 측근자인 영의정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랑 등 30여 명의 무인관료들이 처형되고 그 가솔들이 노비로 전락한다. 이 사건은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사건으로 세조 때부터 남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예종이 그를 제거하는 데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로 남이는 신원된다. 남이의 무덤은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 산 147번지에 있다. 그 후 남이장군은 민간 무속신앙에 남아 귀신을 쫓는 남이 장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 예종의 치세

1469년 예종은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에서 일본과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고, 병영에 딸려 있는 논과 밭을 일반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한다. 공신들이 매관매직을 통해 전횡을 일삼자 분경(奔競)을 금지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한다. 세조때 편찬을 시작한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계속 촤항 등이 찬진하였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성종 때 되어서야 완성한다. 

 

 

예종의 가족들

예종은 두 명의 부인에서 2남 1녀의 자식을 가진다. 정비는 영의정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로 17세에 요절하자, 계비로 우의정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를 맞이한다. 예종은 장순왕후에게 1남(인성대군)을 얻고, 안순왕후에게서 1남 1녀(제안대군, 현숙공주)를 얻는다. 대왕대비가 된 정희왕후의 뜻으로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세자로 책봉되어서 예종의 아들은 아무도 세자가 되지 못하였다. 

 

· 장순왕후 한씨(1445 ~ 1461)

예종의 정비인 장순왕후 한씨는 영의정 한명회와 부인 민씨의 큰딸로 성종의 비인 공혜왕후의 친언니이다. 1460년 세자인 예종과 가례를 하여 세자빈이 되어 다음 해 원손인 인성대군을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1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인성대군은 풍질을 앓다가 1463년 3살 때 사망한다. 그 후 그녀는 성종 3년 1472년 장순왕후로 추존되었으며 그녀의 능은 공릉으로 경기도 파주에 소재한다. 공릉은 세자빈의 무덤으로 난간은 없고 봉분 앞에 장명등과 혼유석만 있고, 능의 양쪽 앞에 문석과 석마를 세우고 석양과 석호가 추가되어 있다. 

 

· 안순왕후 한씨( ? ~ 1498)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로 1462년 예종과 가례를 하여 세자빈이 된다.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 안순왕후에 책봉되었다가 이듬해 예종이 병사하자 1471년 인혜대비로 봉해진다. 그 후 연산군 3년 1497년 다시 명의대비로 개봉되었다가 그 이듬해 사망한다. 그녀의 능은 창릉으로 예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묘역에 합장되어 있다. 

 

· 제안대군(1466 ~ 1525)

예종의 둘째 아들로 안순왕후 한씨의 소생으로 4세 때 아버지 예종이 죽자 왕위계승 1순위이었으나 대왕대비가 된 정희왕후의 반대로 세자가 되지 못한다. 1470년 5세의 나이로 제안대군에 봉해지며 세종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양되다. 12세에 사도시정 김수말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어머니 안순왕후가 그녀를 쫓아내어 14세 때 다시 박중선의 딸과 혼인한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쫓겨난 김씨를 잊지 못해 20세 때 성종의 배려로 다시 합치게 된다. 그는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노래를 즐기며 사죽관현의 연주에 능하였다. 연산군이 네 번이나 음률을 아닌 여자를 내렸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패관 잡기>에 따르면 "그는 몸을 보전하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하였다"라고 기록된다. 그 결과 제안대군은 천수를 누리다가 6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예종의 사망

예종은 즉위하여 1년 2개월 즉 14개월 동안 재위하다가 1469년 11월, 20세에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의 능은 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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