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조선왕조실록

제10대 연산군일기 - 연산군의 등극과 폭정 및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1.

조선의 제10대 국왕 연산군(1476 ~ 1506)은 성종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융(㦕)이며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연산군일기는 총 63권 43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1년 10개월(1494. 12 ~ 1506. 9)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이다. 일기의 편찬은 감춘추감사로 김감을 임명하여 1506년 11월 시작하여 3개월 만에 대신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자 대제학 신용개가 감춘수감사가 되어 재개하여 1509년 9월에 완성되어 보관된다. 연산군 때 시정기가 자주 검열을 받아 누고도 쉽게 직필 하지 못하였으며, 다른 실록과는 달리 편찬자의 명단은 남아있지 않다. 

 

연산군의 등극과 폭정

· 폐비 윤씨 사건

성종시기는 조선시대 전체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였다. 그러나 성종 말기에는 어우동 사건과 같은 약간 퇴폐스러운 사회풍조가 일기 시작한다. 혈기 왕성한 성종도 역시 여자를 좋아하여 궁궐을 나와 규방을 출입하기도 한다. 그리고 12명의 부인과 30명의 자식을 얻는다. 그 결과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고 희대의 폭군 연산군이 나오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성종의 규방 출입이 잦아지자 왕비 윤씨는 이를 투기하여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성종과 인수대비는 왕비 윤씨를 폐할 생각을 굽히지 않고 한명회 등 훈구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세력이 가세하여 결국 왕비는 폐비되게 된다. 폐비되어 사가에 쫓겨간 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의 세자 책봉문제로 조정은 다시 시끄러워 지자, 성종은 폐비 윤씨의 근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궁녀를 보내  보낸다. 그러자 인수대비와 궁녀들이 짜고 전혀 반성의 기색이 없다고 성종에게 거짓 보고를 하여 결국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 폐비 윤씨의 아들 세자 융

세자 융은 당시 4세이어서 어머니 윤씨가 폐출당해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자란다. 성종은 폐비 윤씨 사건을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린다. 세자 융은 정현왕후 윤씨가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자란다. 할머니 인수대비는 융에게 혹독하게 대하나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에게는 자비롭게 대한다. 이런 성장 배경으로 어린 융의 가슴에는 응어리가 져서 세자 융은 성품이 괴팍하고 독단적이고 고집스러워지고, 학문을 싫어하게 된다. 성종은 인수대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직 진성대군이 태어나지 않아서 1483년 폐비윤씨의 자식 8세 융을 세자로 책봉한다. 성종은 사슴을 애완동물로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사슴이 세자 융의 옷과 손등을 핥자 격분하여 사슴을 발로 걷어차 성종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게 된다. 후에 성종이 죽자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을 쏘아 죽여 버린다. 성종은 세자 융의 교육을 위해 너그러운 허침과 깐깐한 조지서에게 부탁한다. 융이 장난을 치면 조지서는 왕에게 이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 허침은 부드럽게 타이런다. 그러자 세자 융은 벽에 "조지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는 낙서를 한다. 나중에 융이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조지서를 죽여 버린다. 

 

연산군의 등극과 폭정

· 연산군의 등극

1494년 12월 38세의 나이로 성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폐병과 피부병 합병증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세자 융은 왕으로 등극한다. 그가 바로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이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으나 며칠만 지나면 성년이 되기 때문에 섭정을 받지 않는다.

 

· 즉위 초기 4년

연산군은 즉위하여 4년 동안은 성종 말기에 나타난 퇴폐풍조와 부패를 일소하였다. 먼저 그는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는다. 인재확충을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명을 뽑고, 귀화 여진족으로 하여금 변방의 여진족을 회유하여 변방을 안정시킨다. 문신의 사가독서(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는 제도)로 학문의 질을 높이고, 후대 왕들의 교육을 위해 <국조보감>을 편찬케 한다.

 

· 무오사화

그러나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승하한 후 즉위한 연산군은 초기 4년 동안 학문을 강요하고 사사건건 간언하는 사림파 관료들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항우가 의제를 죽여 강에 던진 사건을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에 비유하여 쓴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이극돈이 정희왕후 상중 기생과 놀아난 것을 비난한 김종직의 '화술주시'를 김일손이 사초에 싣는다. 이를 알게 된 이극돈이 김일손을 찾아가 내용 삭제를 부탁하였으나 사관이 함부로 사초를 폐기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이극돈은 실록편집이 끝나면 사초를 폐기하고 비밀을 유지하여야 하지만 이를 유출하여, 사림의 공격을 받아 싫어하는 훈구파 유자광을 찾아가 의논한다. 유자광은 노사신, 윤필상 등 훈구대신들과 함께 김일손이 등이 쓴 사초의 내용을 은밀히 연산군에게 보고한다. 1498년(연산군 4년) 연산군은 이를 빌미로 사림파를 대거 숙청한다. 이 사건을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 하며 조선시대 4대 사화(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 중 첫 번째 사화로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한다. 연산군은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을 능지처참하고, 정여창, 김굉필 등 김종직의 제자들은 유배를 보내고, 1492년에 62세의 나이로 이미 사망한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한다. 그 결과 영남 사림파가 몰락하여 사림파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훈구파는 다시 조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귀찮은 사림세력과 일부 훈구세력까지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조정을 독점하게 된다.

 

· 갑자사화

무오사화로 조정은 언론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고 학문을 권하는 이나 간언 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한결같이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만 살아남게 된다. 연산군은 궁궐에서 수백 명의 기생을 동원하여 매일 연회를 벌이며 향락과 패륜을 일삼게 된다. 이때 궁중에 들어오는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의미의 '흥청거리다'는 말이 유래하게 된다. 심지어는 자신의 큰어머니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기도 하며 여염집 아내를 궁궐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연산군은 국고가 비게 되자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전을 빼앗고 노비까지 몰수하려고 한다. 그러자 대신들도 왕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지나친 향락을 자제하여 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한다. 1504년(연산군 10년) 10월에 훈구파 내에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와 육조 중심의 부중파 간의 분란이 발생하자 연산군은 이를 이용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고자 했다. 당시 사림파 일부는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 복위를 반대했고, 정권을 잡으려고 노리던 궁중파인 임사홍은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폐비윤씨사건을 들추어내어 연산군에게 밀고한다. 그러자 연산군은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는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귀인 정씨의 소생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 보냈다가 이듬해 사사하였고, 정씨 소생의 정혜옹주와 엄씨 소생의 공신옹주는 폐서인하고 유배한다.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고 하였다. 연산군은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와 심하게 다투다가 머리를 들이받아 며칠 후 인수대비는 사망한다. 그리고 인수대비의 초상 때에도 삼년상 대신 25 일상을 치르는 단상제를 단행한다. 이때 응교 권달수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묘에 배사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권달수는 죽음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오른다. 그 후 연산군은 폐비윤씨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연산군은 사림파를 숙청한 뒤, 윤씨 폐비와 사사에 찬성했던 이극균, 윤필상, 성준, 김굉필 등 부중파들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한다. 그리고 윤씨 폐출에 가담한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인다. 이 사건이 갑자사화(甲子士禍)로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졌으며,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파 임사홍 일파가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파를 제거한 참살극이라고 할 수 있다. 

 

· 연산군의 폭정

연산군은 모든 권력을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을 없애고 상소, 격고 등 여론 제도를 철폐한다. 그리고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선종의 본산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만든다.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시키는 등 폭정을 일삼는다. 결국 전국에 반정의 무리가 일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게 되는 중종반정이 일어나게 된다. 

 

· 연산군의 사망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를 보낸다. 두 달 후 1506년 11월 연산군은 그곳에서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능은 서울 도봉구 방락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능에는 '연산군지묘'라는 비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연산군지묘

 

연산군의 가족들

연산군은 신승원의 딸 폐비 신씨를 포함하여  2명의 부인에게서 4남 2녀의 자식을 얻는다. 폐비 신씨에게서 2남 1녀(황(폐세자), 창녕대군, ? 옹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후궁에게서 2남(양평군, 돈수)을 낳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