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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14대 선조실록 3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및 삼국에 끼친 영향, 4가지 요구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5.

조선의 제14대 국왕 선조(1552 ~ 1608)의 이름은 이환(李昖)으로, 중종의 아들 덕흥대원군 이초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鈞)이며, 어머니는 하동부대부인 정씨이다. 선조실록은 총 221권 116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567년 7월부터 1608년 2월까지 40년 7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609년 7월에 시작하여 다음 해 11월에 완성한다. 이항복, 기자헌이 총재관으로 총 222인이 편찬 작업에 투입된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임진왜란 및 삼국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이순신

 

임진왜란

· 배경과 원인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1차 임진왜란, 2차 정유재란에 걸쳐 왜국이 조선을 침범하여 일으킨 전쟁을 말한다. 이를 일본에서는 '분로쿠, 케이초의 역'이라고 말하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부른다. 당시 선조 때의 조선은 약 200년 동안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으며, 선조의 정치적 안정을 위한 노력으로 명종 때 비하여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하나로 통일한 시기이다. 서양세력이 밀려들어 제후들의 신흥 상업도시가 발전하여 위협을 받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후 세력의 전쟁 수행능력을 외부로 돌려 그들의 힘을 축소시키고 국민을 하나로 묶으려는 목적으로 전쟁을 계획한다.

 

· 임란 이전 상황

 '대륙 정복'이라는 기치를 내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9년 대마도주로 하여금 '왜와 조선이 서로 힘을 합쳐 명을 치자'라고 사신을 보내게 한다. 일본의 제의를 받은 선조는 내용이 오만무례하다는 이유로 수로가 좋지 못하다는 핑계를 대며 통신사를 보내지 않는다. 여러 번에 걸친 통신사 요구가 있고, 그해 11월, 정여립 모반사건을 수습한 조정은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알아보기 위해 통신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일, 서정관에 허성으로 임명하여 통신사를 보내기로 한다. 1590년 3월 일본으로 출발한  조선통신사는 이듬해 3월 왜국의 동태를 살피고 한양으로 돌아온다. 이때 서인인 황윤길은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침략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동인인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이 보잘것이 없으며 전쟁 대비를 하면 민심만 혼란해질 것이라고 보고한다. 동인이지만 서장관 허성과 김성일을 수행하던 황진도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동인이 우세하여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전란에 대비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래서 전쟁에 대비하여 성을 쌓는 등의 전국에 내려진 명령을 중단한다. 그 후에도 선위사 오억령이 '일본이 다음 해 일본이 조선의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한다.'라고 보고하였지만 조정은 무시하고 오히려 그를 파직시킨다. 그 후 왜관에 파견된 왜인들이 본국으로 소환되어 텅 비게 되자, 그제야 조정은 일본의 대규모 침략을 감지하고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보내고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구축하기 시작하고, 신립을 경기도 황해도로 이일을 충청도와 전라도에 급파하여 무기와 시설을 점검한다.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었다. 

 

· 시작과 경과

1592년 4월 13일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20만의 왜군이 9개 부대로 나누어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니 이가 곧 '임진왜란'이다. 고니시 부대에 의해 부산포가 함락되면서 왜군은 빠른 속도로 북상하여 충주를 함락하고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에 한양이 함락된다. 이후 6월 평양을 내준 선조는 의주성까지 피난을 가고 명나라에 원군을 청한다. 다행히도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전라도 수군은 연승을 하였으며, 의병의 봉기, 명나라의 원군으로 다시 왜군을 격퇴하여 이듬해 4월에 한양을 되찾는다. 그러자 왜군은 남하하여 울산과 진주에 성을 쌓고 화의를 진행하고, 한편으로 진주성에 보복 공격을 가하여 진주성을 함락한다. 이 진주성 전투에서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희, 충청병사 황진 등이 전사하고 수만의 민간인이 희생된다.

 

· 강화협상과 실패

명은 화의를 일단 받아들여 심유경을 보내 2~3년에 걸친 지루한 도요토미와의 강화 협상을 진행한다.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도요토미는 '4가지 요구'(1.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궁으로 보낼 것, 2. 무역허가 증명인 감합인을 복원할 것, 3. 조선의 4도를 할양할 것, 4.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를 제시하며 포로가 되었던 임해군순화군을 돌려보낸다. 그러자 심유경은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도요토미가 명나라 황제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을 받기 원한다'라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명 황제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 일본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허락한다'라는 내용의 책봉임명서인 '봉공안'을 받아온다. 그는 일본 장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짜고 봉공안을 가져가 글을 모르는 문맹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거짓으로 읽어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승려인 사이쇼 조타이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읽어 주는 바람에 탄로가 난다. 그 결과 심유경은 일본으로 망명하려다가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나라와 황제를 기만한 죄'로 처형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의 지리에 밝다는 이유로 죽음을 면하게 된다.

 

· 정유재란

4년에 걸친 강화협상은 무산되고 심유경과 고니시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도요토미는 1597년 1월 15일, 15만의 왜군으로 다시 조선을 침입하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군도 압록강을 건너 다시 들어왔다. 그러나 그동안 방비책을 준비한 조선군과 명군의 반격으로 왜군은 충청도를 넘지 못한다. 그해 8월 도요토미가 병으로 사망하자 왜군들은 철수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겨우 퇴로를 열어 그해 11월 완전히 일본으로 도망간다. 이로써 6년 7개월 동안 지속된 조·일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피해 복구와 민심안정에 전력을 다한다. 사치를 배격하고 농토를 개간하고 양식을 절약하는 등 민간 경제에 힘쓴다. 전란 중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신분에 관계없이 공신과 녹훈을 한다.

 

 

임진왜란이 끼친 영향

· 조선

약 7년간의 전쟁이 끝나게 되자 조선은 사회의 경제가 완전히 붕괴 파탄되고 탐관오리의 부패가 심해진다. 막심한 인명피해와 더불어 농경지도 황폐화되어 전국 170만 결이던 농토가 54만 결로 줄어든다. 납속책의 시행으로 서얼, 농민, 천민, 노비 등의 신분이 상승으로 신분제도가 흔들리게 된다. 전란 중 백성들의 처참한 생활로 인육을 먹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조정에 불만을 품고 1594년 송유진의 난, 1596년의 이몽학의 난 등이 일어난다. 또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고 서적, 미술품, 유물등이 약탈당하였다. 전주사고만 제외하고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소실된다. 한편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무예를 단련하게 하였으며, 지방에 예비군인 속오군을 두었다. 전란 중에 비격진천뢰화차를 발명하였으며, 습득한 조총을 제조하여 실전에 배치하는 등 각종 무기 제조로 국방력을 강화하게 된다. 전란 중 명군의 지원으로 숭명사상이 높아져서 관우 숭배사상이 전래된다.

 

· 명나라

조선의 요청으로 대규모의 원병을 파견하여 엄청난 국력을 소모하고 재정이 문란해져 국방력이 약해진다. 그 결과 여진족의 세력을 팽창하도록 방치하여 여진족인 청나라에 의해 나라가 망하게 된다. 

 

· 일본

조선에서 도공을 끌고 가 도자기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약탈해 간 활자의 영향으로 활자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포로로 끌고 간 성리학자와 <퇴계집> 등 성리학 관련 서적을 가져가 일본의 지도이념을 세우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은 17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선은 비록 왜의 침입으로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당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가 약화되고 백성인 민간의 힘이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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