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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17대 효종실록 - 소현세자의 죽음과 효종 즉위 및 북벌정책과 가족들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12.

조선의 제17대 국왕 효종(1619 ~ 1659)의 이름은 이호(李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로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며, 어머니는 인열왕후 한씨이다. 효종실록는 총 21권 22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649년 5월부터 1659년 5월까지 10년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660년 5월에 시작하여 1661년 2월에 완성한다. 편찬 작업에는 총재관 이경석을 비롯하여 총 59명이 참여한다. 여기에서는 소현세자의 죽음과 효종 즉위 및 북벌정책과 가족들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효종영릉

 

소현세자의 죽음과 효종 즉위

· 소현세자의 죽음

1637년 청 태종은 병자호란을 종결짓고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척화파 대신들을 심양에 인질로 잡아간다. 이듬해 인평대군은 돌아왔으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른다. 이때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부 아담 샬을 통해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 서양문물에 심취하여 받아들이는 반면에,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된다. 봉림대군은 서양문물에 심취하지는 않고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사정을 조선에 전해준다. 그리고 그는 패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의 관리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이러한 심양에서의 경험이 반청 사상을 굳건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귀인 조소용과 김자점 등 친명반청에 빠진 조정대신들이 소현세자가 청에서 왕노릇을 한다고 인조에게 이간질을 한다.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를 조선 국왕으로 부적격하다는 판단에 이른다. 이 무렵 청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자 일행을 풀어준다. 당시 청은 인조를 철저한 반청주의자로 낙인을 찍고, 반면에 소현세자는 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45년 마침내 소현세자 일행은 9년 동안의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에 귀국한다. 그러나 인조는 그를 반기지 않고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는 인조의 총희 귀인 조소용과 사이가 좋지 않아 더욱 상황이 악화되었다. 입국한 지 2달 뒤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눕고 온몸이 까맣게 변하여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당시 어의의 진단은 학질로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이 세 차례 침을 놓았으며, 침을 놓은 지 3일 만에 사망하였다. 그 후 대사헌 김광현이 어의 이형익의 침시술 잘못을 따지자, 인조는 화를 내며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좌천시켜 버린다. 학자 이식은 소현세자 묘지문에 '환궁 이후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시술이 잘못되어 죽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아마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일반 평민에 준하여 치르게 한다. 소현세자의 사망소식을 듣고 봉림대군은 1645년 5월 급히 귀국한다. 

 

· 세자 책봉과 효종 즉위

소현세자가 죽은 후 3개월이 지나자 인조는 병을 핑계로 세자 책봉문제를 거론한다.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을 세자로 봉해야 한다고 주청을 한다. 그러나 인조는 세손 석철은 열 살로 너무 어리다는 핑계로 1645년 9월 봉림대군을 세자에 책봉한다. 이듬해 인조는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고,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낸다. 그곳에서 두 아들은 병에 걸려 사망한다. 그 후 인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그들을 돌보던 나인까지 곤장을 때려죽인다. 인조는 봉림대군의 반청 사상이 자신의 대명사대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아 큰아들을 죽이고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1649년 5월 인조가 사망하자, 봉림대군은 인조의 뒤를 이어 31세의 나이에 왕으로 즉위한다. 그가 바로 북벌론을 주장하며 국력 강화에 힘쓴 조선 제17대 국왕 효종이다.

 

 

효종의 북벌정책과 조선의 안정

· 김자점 역모사건

효종은 8년 동안 청나라에 볼모로 있을 때 형인 소현세자를 보필하며 서쪽으로 몽고, 남쪽으로는 산해관 등지에 전쟁을 수행하며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으며, 온갖 멸시와 고통을 당하며 청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효종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의 북벌론에 따라 북벌 계획을 추진하여 먼저 김자점 등의 친청파를 제거하기 시작한다. 김자점은 인조의 귀인 조소용의 소생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 김세룡을 혼인시킴으로써 친청파의 거두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김상헌, 송시열 등 반청인사들로 하여금 김자점을 탄핵을 하여 유배를 보낸다. 그러자 김자점은 유배지에서 역관 이형장을 시켜 '효종이 청나라를 치려고 한다'라고 청나라에 고발한다. 청은 군대를 압록강 근처에 배치하고 사신을 보내 진상을 조사한다. 조선은 이경석 등을 보내 외교로 무마하고 김자점을 다시 광양으로 유배를 보낸다. 1651년 김자점은 다시 귀인 조소용과 짜고 아들 김익을 시켜 수어청과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김집, 송시열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을 추대하려 하는 역모를 꾀한다. 이는 미리 발각되어 김자점은 아들 김익, 김식과 함께 처형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축출된다. 또한 인조의 후궁 귀인 조소용도 사약을 받아 사망한다. 이 사건을 '김자점 역모사건'이라 한다.

 

· 효종의 군사력 강화

김자점 역모사건으로 친청 세력을 모두 제거한 효종은 이완, 유혁연 등 무장들을 중용하며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을 추진한다. 1652년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1655년 왕을 호위하는 금군을 기병화 하는 동시에 '내삼청'에 통합하고, 그 수를 1000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한다. 또한 남한산성의 수어청을 강화하여 한성 외곽의 방비를 보강한다. 1656년에는 지방군인 속오군에 정예 인력을 보강한다. 네덜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등 신무기를 개발한다.

 

· 나선 정벌

효종은 북벌을 계획하며 군사력을 강화한 결과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을 감행한다. 나선(러시아)은 흑룡강변의 풍부한 자원을 탐하여 송화강 유역에 칩입하여 노략질을 일삼는다. 그러자 청은 조선의 조총군의 도움을 요구한다. 1654년 4월 조선은 변급을 대장으로 조총군 100명과 기타 병력 50명을 영고탑에 파견하여 청군과 함께 나선군을 흑룡강 이북으로 격퇴시킨다. 이것이 제1차 나선정벌이다. 그 후 조선은 1658년 6월 청의 요청에 따라 신류를 대장으로 조총부대 200 명과 기타 병력 60명을 송화강과 흑룡강 합류지점에 파견한다. 그 결과 배 10여 척을 불태우고 흑룡강 주변 나선군을 거의 섬멸한다. 이것이 제2차 나선정벌이다. 

 

· 효종의 치세

효종은 두 번의 나선정벌을 기회로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북벌 추진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청은 더욱 세력이 강해지고 있어 북벌의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효종은 국방강화와 동시에 경제적인 안정을 추진한다. 두 번에 걸친 청과의 전쟁으로 파탄된 경제를 확립하기 위해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고, 전세를 1 결당 4두로 고정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인다. 역법을 개정해 태음력과 태양력을 결합한 시헌력을 사용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유통시킨다. 또한 문화사업으로 <국조보감>을 재편찬하고, 농업생산을 늘리려 농서인 <농가집성>을 편찬한다. 그리고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 김정국이 쓴 <경민편>을 간행한다. 결국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론으로 잘 알려진 군주로서 10년의 치세 동안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진 임금이기도 하다. 대동법 등 인조대 갖은 외환과 시행착오로 좌충우돌하던 제도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아 시행했으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고 조선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렇듯 효종은 재위 기간 동안 군사력 강화 제도 개혁으로 나라의 안정이 이루어졌지만, 과로로 인해 1659년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효종의 사망과 가족들

· 효종의 사망

결국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굴에 난 종기를 침으로 치료한 후 피를 너무 많이 흘러 1659년 5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능은 영릉(寧陵)으로 처음 경기도 구리시 건원릉의 서쪽에 모셔있다가 나중에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으로 옮겨, 세종의 영릉(英陵)과 가까이 있다. 그의 죽음은 정통성 문제로 1659년 서인(1년)과 남인(3년) 간의 가장 치열한 예송논쟁인 기해예송을 일으키게 한다.

 

· 가족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를 비롯하여 4명의 부인에게서 1남 7녀의 자녀를 가지게 된다. 그의 가족으로는 인성왕후 장씨에게서 1남 6녀(현종, 숙신, 숙안, 숙명, 숙휘, 숙정, 숙경공주), 안빈 이씨에게서 1녀(숙녕옹주)를 낳는다. 그리고 숙의 김씨와 숙원 정씨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 인선왕후 장씨(1618 ~ 1674)

우의정 장유의 딸이며, 13세인 1630년 한살 어린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에 봉해진다. 1637년 남편 봉림대군을 따라 청나라 심양에 8년간 생활을 하고 1645년 소현세자가 죽어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된다. 1649년 봉림대군이 왕으로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그후 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효숙대비로 있다가 56세 나이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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