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 ~ 1720)의 이름은 이순(李焞)으로 현종의 외동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왕후 김씨이다. <숙종실록>는 총 65권 73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674년 8월부터 1720년 6월까지 45년 10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720년(경종 1년) 11월에 시작하여 1728년(영조 4년) 3월에 완성한다. 편찬작업이 8년 동안 오래 걸린 이유는 노론과 소론의 정쟁이 심하여 정권이 바뀔 때마다 편찬 책임자가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이다. 총재관은 노론의 김창집에서 소론의 조태구, 최석항, 이광좌로 바뀌었다가, 경조가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실록의 책임자가 다시 노론으로 바뀌어 실록이 거의 완성된다. 그러나 정미환국이 일어나 이광좌 등 소론이 집권하자 소론 측은 실록의 빠진 부분을 보강하고 틀린 부분을 고친다고 하여 '보궐정오'를 덧붙인다.
숙종의 환국정치와 왕권강화
· 숙종의 환국정치
숙종시대는 전체 조선 시대에서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러 가장 당파 정쟁이 심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숙종은 1667년 7세에 세자로 책봉되고 1674년 14세의 나이로 왕이 되어 섭정 없이 곧바로 친정을 시작한다. 그는 비상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시킨다. 따라서 숙종은 전란 후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숙종은 중전과 후궁에 대한 애증 문제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수많은 옥사를 발생시켜 흠을 남기기도 하였다. 현종 이후 숙종대까지 계속 이어진 예송논쟁에 현종은 더 이상 논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바로 서인 송시열이 다시 복상문제를 들고 나온다. 이에 숙종은 즉각 부왕 현종의 의견에 따라 남인의 기년설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을 유배를 보내 버린다. 그 결과 서인은 약해지고 조정은 남인이 장악한다.
· 경신환국(1680년)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 허적이 조부 허잠의 잔치에 비가 내리자 군사 물자인 기름을 바른 천막 유악을 숙종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빌려간 것이다. 이에 숙종은 남인이 권세를 믿고 왕을 무시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남인들이 가지고 있던 군권을 전부 서인에게 주어버린다. 그리고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인 김석주를 기용하여 남인 세력들을 견제한다. 김석주는 원래 서인 사람이지만 제2차 예송논쟁 때 남인 쪽에 붙어 기년설을 주장하였던 사람이다. 김석주는 이번에는 서인 송시열 세력과 협력하여 남인을 몰아내는 계략을 꾸며낸다.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삼복형제들과 함께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을 하는 '삼복의 변'이 일어난다. 내용은 숙종이 병일 앓는 것을 왕위를 넘보는 행위로, 도체찰사 소속 이천 둔군을 몇 차례 훈련을 시킨 것을 사적으로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본 것이다. 둔군은 영의정 허적과 윤휴 등이 주장하여 다시 설치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남인의 영수 허적, 윤휴 등 남인 세력을 역모로 모는 '경신대출척' 또는 '경신환국'을 일어난다. 그 결과 남인은 축출되고 서인의 노론세력이 정권을 잡게 된다.
· 기사환국(1689년)
1688년 숙종은 정비에서 자식을 보지 못하고 총애하던 숙원 장씨가 소의로 승격되어 왕자 윤을 생산하자, 1689년 1월 숙종이 왕자 윤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자, 서인 노론 측 대신들은 아직 중전 인현왕후 민씨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젊으며, 이제 태어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기다려보자고 반대한다. 이에 숙종은 왕자 윤의 세자 책봉을 거론한 지 5일 만에 왕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소의를 빈으로 승격한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발이 끊이지 않자 숙종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분노하며, 반대하는 노론의 송시열과 영의정 김수홍을 삭탈관직하고, 남인 세력인 목내선, 김덕원, 민암 등을 대거 등용한다. 그 후 송시열은 유배되어 사사되고, 이이명, 김만중, 김수홍 등은 유배되거나 사사되었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그해 5월 숙종은 원인이 인현왕후 민씨에게 있다고 하여 중전을 폐위하려고 하자 서인 오두인, 박태보 등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파직된다. 그 후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하여 안국동 본가로 보내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앉힌다. 일개의 궁녀이었던 그녀가 왕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장렬왕후의 동생인 조사석과 한때 내연의 관계에 있었던 장희빈의 어머니와 궁중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한 왕실의 종친인 선혜청제조 동평군 항을 끌어들인 오빠 장희재의 공이 크다. 이 때문에 장희빈은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도 돌기도 하였다. 아무튼 장희빈은 조사석과 동평군 항의 도움으로 왕비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장희빈은 남인세력과 은밀히 연합하여 서인과 인현왕후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서인(노론, 소론)은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 갑술환국(1694년)
그 후 시간이 흘러 1694년, 숙종이 인현왕후가 폐비가 된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에 이를 눈치채고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복위 운동을 전개한다. 이 정보를 입수한 남인의 민암 등은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을 비롯하여 수십 명의 서인을 옥에 가둔다. 그러자 숙종은 이번에는 민비의 폐비를 후회하던 중이라 오히려 남인의 민암을 사사하고 권대운, 목내선 등을 유배시킨다. 그리고 훈련청과 어영청의 군권도 소론에게 주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등을 중용한다. 그리고 사사된 노론 측의 송시렬, 김시항 등을 신원하고 복관한다. 폐비된 민씨를 다시 중전 인현왕후로 복위시키고, 중전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킨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그 결과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된다.
· 무고의 옥(1701년)
소론이 정권을 잡은 후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편지에서 폐비 민씨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조정에서는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소론의 남구만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봐 용서하고 사건을 무마시킨다. 당시 조정은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의 지지 여부를 두고 노론과 소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소론이 정권을 잡은 지 5년 만인 1701년, 복위된 인현왕후 민씨가 병으로 죽게 되자 장희빈의 거처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두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것이 발각된 사건인 '무고의 옥'으로.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고, 장희재와 관련된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인다. 그 결과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 소론 세력이 유배되거나 파면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된다.
· 환국정치의 장단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숙종은 필요에 따라 한쪽의 붕당세력이 너무 강해지면 이를 견제하고 제거하는 환국정치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왕권을 확실하게 강화시키는 환국정치를 이어나가면서 허적, 윤휴, 송시열, 김수항 등 뛰어난 신하들을 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거나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도 죽이기까지 하였다.
· 숙종의 업적
숙종의 업적은 다음과 같다. 1.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공물 대신 쌀로 세금일원화를 완성한다. 2. 양전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 삼남 지방까지 실시함으로써 전국에 걸쳐 양전을 실시한다. 3. 상평통보를 발행하여 상업 활동을 촉진하고 화폐 경제를 발전시킨다. 4.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 환국 정치를 시행하여 왕권을 강화한다. 5. 청나라와의 국경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백두산이 조선의 영토임을 공고히 한다. 6. 금위영을 신설하고, 5 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군제 개편을 완료하고, 군포를 양정 1인에 2 필로 하여 민간의 부담을 줄인다. 7. 숙종은 <대명례집>, <북관지> 등을 편찬하고,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간행한다. 또한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에 입각하여 대보단을 세우고, 사육신을 복관하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올린다. 그리고 300여 개의 서원사우를 건립한다.
노론과 소론의 탄생
· 훈서파와 청서파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 세력들은 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세력인 김류 등의 훈서파와 반정을 관망하던 세력인 김상헌 등의 청서파로 나누어진다. 인조 말에 와서 훈서파는 원두표의 원당과 김자점의 낙당으로 분파되고, 청서파는 사림 중심의 산당과 권력 지향적인 한당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효종, 현종 대에 들어와서는 다시 송시열을 중심으로 서인으로 합쳐진다.
· 노론과 소론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1680년에 경신환국 때 남인 탄압에 대한 입장차이로 서인은 다시 강력한 탄압을 주장하는 송시열, 김익훈 등의 노장파인 노론과 이를 반대하는 한태동, 윤증 등의 소장파인 소론으로 나누어진다.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송시열, 김만기, 김만중, 김석주, 김수항, 김수홍, 김익훈 등이 있고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구만, 박세채, 박태보, 오도일, 윤증, 한태동 등이 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노론 송시열, 김수항 등이 유배당해 죽고, 소론의 많은 인사도 숙청당한다. 그 후 1694년 '갑술환국' 때 서인의 소론이 정권을 잡다가 다시 1701년 '무고의 옥'으로 소론이 밀려나고 노론이 대거 등용된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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