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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19대 숙종실록 2 - 숙종의 죽음과 가족들, 인현왕후 민씨, 희빈 장씨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13.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 ~ 1720)의 이름은 이순(李焞)으로 현종의 외동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왕후 김씨이다. <숙종실록>는 총 65권 73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674년 8월부터 1720년 6월까지 45년 10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720년(경종 1년) 11월에 시작하여 1728년(영조 4년) 3월에 완성한다. 편찬작업이 8년 동안 오래 걸린 이유는 노론과 소론의 정쟁이 심하여 정권이 바뀔 때마다 편찬 책임자가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이다. 총재관은 노론의 김창집에서 소론의 조태구, 최석항, 이광좌로 바뀌었다가, 경조가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실록의 책임자가 다시 노론으로 바뀌어 실록이 거의 완성된다. 그러나 정미환국이 일어나 이광좌 등 소론이 집권하자 소론 측은 실록의 빠진 부분을 보강하고 틀린 부분을 고친다고 하여 '보궐정오'를 덧붙인다. 여기에서는 숙종의 죽음과 가족들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숙종장희빈

 

숙종의 죽음과 가족들

· 숙종의 사망

붕당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환국정치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던 숙종은 1720년, 약 46년간 통치를 끝내고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능은 명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에 소재하고 있다.

 

· 가족들

숙종은 인경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9명의 부인에게서 6남 2녀의 자식을 얻는다. 숙종의 부인과 자식으로는 다음과 같다. 인경왕후 김씨에게서 2녀(일찍 사망),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희빈 장씨에게서 2남(왕자 윤(경종), 성수)숙빈 최씨에게서 3남(영수, 영잉군(영조), ? ), 명빈 박씨에게서 1남(연령군), 영빈 김씨, 귀인 김씨, 소의 유씨가 있다. 

 

· 인경왕후 김씨(1661 ~ 1680)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열 살 때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671년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1676년 왕비로 책봉된다. 1680년 천연두로 발병 8일 만에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능은 익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 인현왕후 민씨(1667 ~ 1701)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된다. 그녀는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으나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여 희비 장씨가 왕자 윤을 출산하자 많은 설움을 당하게 된다. 1689년 1월 숙종이 왕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자, 대신들은 아직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나이가 어리니 기다려보자며 반대한다. 이에 숙종은 반대하는 노론의 송시열을 사사하고 왕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소의를 빈으로 승격한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그해 5월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여 안국동 본가로 보내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앉힌다. 서인 오두인, 박태보 등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파직된다. 그 결과 서인은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그 후 1694년 숙종이 인현왕후가 폐비가 된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에 이를 눈치채고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복위 운동을 전개한다. 남인의 민암 등은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을 비롯하여 수십 명의 서인을 옥에 가둔다. 그러자 숙종은 이번에는 민비의 폐비를 후회하던 중이라 오히려 남인의 민암을 사사하고 권대운, 목내선 등을 유배시키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등을 등용한다. 그리고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으로 복위시키고, 중전인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킨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그 결과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복위 후 인현왕후 민씨는 강등된 희빈 장씨와 화합을 도모하다가 병을 얻어 1701년 자식이 없이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이야기를 한 궁녀가 <인현왕후전>으로 기록하여 현재에 전해진다. 그녀의 능은 명릉으로 숙종과 같이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소재하고 있다. 

 

· 인원왕후 김씨(1687 ~ 1757)

경원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1701년 인현왕후가 죽자 간택되어 다음 해 왕비로 책봉된다. 1720년 숙종이 죽자 왕대비가 되었다가, 1724년 경종이 죽자 다시 대왕대비가 된다. 슬하에 자식은 없으며 인현왕후, 숙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묻혀 있다. 

 

· 희빈 장씨(1659 ~ 1701)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역관 장현의 종질녀로 이름은 옥정이다. 한때 그녀는 장렬왕후의 동생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아무튼 그녀는 조사석과 숙종의 종친 동편군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어 장렬왕후의 시녀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된다. 1686년 숙원을 거쳐, 1688년 소의로 승격되어 왕자 윤을 생산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는다. 그 후 1689년 기사환국으로 왕자 윤은 세자가 되고 장소의는 희빈이 된다. 같은 해 5월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자 장희빈은 중전이 된다. 그 후 시간이 흘러 1694년, 민비의 폐비를 후회하던 숙종은 갑술환국으로 중전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된 민씨를 다시 인현왕후로 복위시킨다. 이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편지에서 폐비 민씨와 관련된 내용이 나와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소론의 남구만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봐 용서하고 사건을 무마시킨다. 1701년 복위된 인현왕후 민씨가 병으로 죽게 되자 장희빈의 거처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두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것이 발각된다. 숙종은 이에 격노하여 장희빈과 그의 오빠 장희재를 사사하고 관련된 궁인, 무녀 등도 함께 죽이는 사건인 무속신앙으로 비롯된 '무고의 옥'이 벌어진다. 이로써 희빈 장씨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숙종은 그 후 빈이 후비로 승격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다. 희빈 장씨가 죽자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의 소론 세력을 몰락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된다. 그녀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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