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21대 국왕 영조(1694 ~ 1776)의 이름은 이금(李昑)으로 숙종의 넷째 아들 연잉군이며, 어머니는 숙빈 최씨이다. <영조실록>는 총 15권 7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724년 8월부터 1776년 3월까지 51년 7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778년 2월에 시작하여 1781년 8월에 완성되었다. 편찬에는 총재관 김상철, 서명선, 이은, 이휘지, 정존겸를 비롯하여 총 183 명이 투입된다.
영조의 등극
· 어린 시절
숙종은 9명의 부인에게서 6남 2녀의 자식을 얻었지만 정실인 3명의 왕비(인경, 인현, 인원왕후)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나인 출신 희빈 장씨와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에게서 아들을 얻게 된다. 희빈 장씨의 아들은 후에 경종이 되는 왕자 윤이고, 그보다 6살 어린 숙빈 최씨의 아들은 자라서 영조가 되는 왕자 금(연잉군)이다. 왕자 윤은 생후 두 달 때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자가 되고, 3세 때 세자가 된다. 그리고 14세 때 어머니 희빈 장씨가 숙종의 사약을 받아 죽게 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병을 얻어 제왕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없고 자식 낳지 못한다. 결국 이것이 이복동생인 왕자 금(연잉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는 빌미가 된다.
· 연잉군의 세자대리청정
숙종은 1716년 병신처분으로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중용한 후, 1717년 세자 윤이 병약하고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노론의 영수 이이명을 독대하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으로 후사를 정할 것을 부탁한다(정유독대). 그리고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자 윤을 대신하여 편전에 참석하여 정사를 배우는 것인 '세자대리청정'을 명한다. 이때부터 세자 윤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당쟁이 격화하게 된다.
· 왕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
1720년 숙종이 사망하자 가까스로 세자 윤이 33세의 나이로 경종이 된다. 경종이 병으로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하자, 노론세력들은 경종에게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에 책봉할 것을 건의한다. 이에 연잉군은 왕위를 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소를 올리며 극구 사양한다. 그러나 노론세력의 주장에 따라 결국 1721년 경종은 연잉군을 왕세제에 책봉한다. 그 후 노론은 왕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요구한다. 이에 경종은 네 번이나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허락하였다가 소론과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로 다시 회수한다. 사실 노론의 대신들은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얼마 후 전국유생들과 소론들의 반발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이를 회수하여 줄 것을 요청한다. 이와 같은 노론의 일관성이 없는 행동이 소론 측의 비난을 받으며 궁지에 몰리게 된다. 결국 노론과 소론 간에 당파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1721년 신축옥사와 1722년 임인옥사인 '신임사화'를 거쳐 소론은 실권하고 노론이 권력을 잡게 된다. 이때 왕세제 연잉군도 임인옥사에 가담하였지만 연잉군 이외에는 왕통을 이을 사람이 없어 연잉군은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 상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하세요. 제20대 경종실록 - 비운의 왕 경종의 등극 및 신임사화와 경종의 가족들
· 영조의 등극
1724년 8월 경종은 재위 기간 4년 2개월 동안 병상에만 있다가 자식도 없이 사망한다. 이에 이복동생인 세제 연잉군이 왕으로 즉위한다. 그가 바로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이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이었다.
영조의 탕평 정책
· 탕평 정책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이 된 영조는 붕당 정치의 갈등을 해소하고 왕권 강화와 국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탕평정책을 실시한다. 노론, 소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영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인재로 고르게 등용하고,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고, 이조 전랑의 권한을 축소시켜 후임자 천거권과 3사 관리 선발권을 폐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과 소론의 당쟁의 지속되고, 소론 강경파들이 변란을 일으키면서 점차 조정은 노론이 주도하게 한다. 그러나 영조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 탕평 교서를 발표하고 탕평비를 건립하는 등의 탕평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한다. 후기 안정기에 접어들어 실사구시의 학문인 실학이 일어나는 등 사회전반에 새로운 바람이 불게 된다. 영조의 탕평정책은 조선 후기 정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이후 정조는 영조의 탕평정책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킨다.
· 김일경의 교문 사건(1724년)
영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신임사화에 대해 책임을 추궁한다. 이에 노론 이의연이 세제시절 영조에 대한 모욕이라 하여 단죄를 상소하다가 오히려 소론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또한 노론 송재후가 임인옥사를 조사한 결과를 기록한 김일경의 교문 초고 중 3건의 문서, 종무(노환공자가 자신의 형을 죽인 것), 사구(조고가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를 죽이고 호해를 세운 것), 접혈(당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인 것) 등에서 '세제 연잉군을 경종을 죽이려고 하는 극악무도한 인간으로 몰고 갔다'라고 하여 이를 단죄하기를 상소한다. 이에 영조는 친히 국문을 하여 소론의 김일경과 임인옥사를 일으킨 남인의 목호룡을 처형한다.
· 을사처분(1725년)
김일경과 목호룡을 등을 숙청한 영조는 1725년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낼 때 동조한 이진유 등 6명을 귀양 보낸다. 그리고 노론 측 주장에 따라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 세력을 몰아내고 민진원, 정호 등 노론 인사를 등용한다. 이를 '을사처분'이라 한다. 그 결과 소론이 약해지고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된다.
· 정미환국(1727년)
정권을 잡은 노론은 신임사화 때 죽은 4대신과 희생자들에 대한 신원과 복관을 주장하여 성사시킨다. 그리고 노론의 정호, 민진원 등이 임인옥사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주장한다. 이에 탕평책을 추진하였던 영조는 이에 반대하여 정호, 민지원 등 노론을 대거 파면시키고 을사처분 때 파면시켰던 이광좌, 조태억을 다시 정승으로 삼고, 소론 세력들을 기용한다. 이를 '정미환국'이라 한다. 그 결과 노론이 약해지고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정권을 잡은 소론은 다시 임인년 사건을 들고 나와 4대신의 잘못을 논한다. 이에 영조는 4대신의 죄명을 씻어주고 관작만 삭탈하는 선에서 소론 측과 타협을 본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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