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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21대 영조실록 2 - 영조의 탕평정책과 업적, 이인좌의 난 사도세자 사건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15.

조선의 제21대 국왕 영조(1694 ~ 1776)의 이름은 이금(李昑)으로 숙종의 넷째 아들 연잉군이며, 어머니는 숙빈 최씨이다. <영조실록>는 총 15권 7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724년 8월부터 1776년 3월까지 51년 7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778년 2월에 시작하여 1781년 8월에 완성되었다. 편찬에는 총재관 김상철, 서명선, 이은, 이휘지, 정존겸를 비롯하여 총 183 명이 투입된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영조의 탕평정책과 업적, 이인좌의 난과 사도세자 사건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영조

 

영조의 탕평 정책

· 이인좌의 난(1728년)

1728년(영조 4년) 3월, 소론 강경파와 남인 과격세력이 '영조와 노론이 경종의 죽음에 관련되었다'라고 주장하며, 경종을 위한 보복의 명분으로 왕권교체를 기도하며 난을 일으킨다.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불린다. 사건의 발단은 숙종이 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 윤이 병약하다고 노론 이이명을 불러 연잉군(영조)로 하여금 경종의 대를 잇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1717년 정유독대로부터 비롯된다. 경종이 갑자기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정치적 위협을 느낀 소론의 박필현, 이유익, 이인좌, 심유현 등 소론 강경파는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들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 대신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갑작스런 경종의 죽음에 대한 독살 의혹을 제기하며,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군사동원계획까지 마련한다. 이를 명분으로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 영조와 노론을 무력으로 제거하려고 하였다. 1725년부터 박필현 등은 한성 내부와 각 지방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선별하였으며 경종 독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1727년 정미환국으로 온건 소론세력들이 정권을 잡게 되자 동조자가 줄어들고, 최규서, 양성인, 김중만 등의 고변으로 모반계획은 탄로 난다. 그러자 이인좌 등의 반란군은 군사를 일으켜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가 되고 청주성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한성을 향해 나아간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도 반란에 호응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은 3개월 만에 모두 관군에게 진압되고 이인좌와 주모자 박필현, 박필몽 등은 처형된다. 이 난의 주모자 대부분이 소론이기 때문에 소론은 크게 타격을 받고, 영조는 탕평책의 명분을 강화시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또한 영남 지역이 조선 후기 정치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는다.

 

· 기유처분(1729년)

이인좌의 난 이후 탕평책의 명분을 강화한 영조는 1729년(영조 5년) 노론과 소론의 인사들을 골고루 등용하여 탕평정국을 기초를 다지는 기유처분을 한다. 노론과 소론 간의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는 신임옥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탕평파의 집권 명분을 확보하고, 신임옥사에 관련 인물의 신원에 대해 절충안을 제시하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노론과 소론의 연정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때 영조는 탕평책의 일환으로 '쌍거호대'의 정책을 실시한다.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에 앉히면 소론의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한다. 또한 판서에 노론을 앉히면 참판에는 소론으로 상대하게 하고, 참의에 소론이면 전랑에 노론으로 상대하게 한다. 그 결과 자신의 의도대로 왕권이 강화되자 영조는 인재중심의 인사정책인 '유재시용'의 정책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영조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등 사색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정국을 더욱 확대하여 나간다. 


· 사도세자 사건(1762년)

탕평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기 시작한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 시대 왕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1762년 영조 38년에 발생한 사도세자(장헌세자) 사건다. 이 사건은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장헌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으로, 여러 정치적, 개인적 요인들이 얽혀 있다. 영조는 두 명의 왕후에게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효장세자, 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러나 큰아들 효장세자는 세자 책봉 후 바로 요절하여 둘째 아들 왕자 선이 세자에 책봉된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으로 하여금 대리청정하게 한다. 그러자 각 4색당파에서는 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중 노론과 노론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김씨와 숙의 문씨 등이 영조와 세자 사이를 멀어지게 하기 위해 이간질을 하기 시작한다. 정순왕후 김씨와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을 하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궁녀를 죽이거나,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다. 영조는 점점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키면 안 되겠다고 판단하는 등  영조와의 갈등을 심화된다. 그러던 중 1761년 세자 선은 아버지 영조가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다. 이때 노론 측 윤재겸 등이 세자의 유람이 잘못되었다는 소를 올린다. 이에 영조는 세자의 관서유람과 관여된 모든 자들을 파직시킨다. 그 후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가지'를 무고한다. 결국 영조는 화를 못 참고 휘령전으로 불러 세자에게 자결을 명한다. 그러나 세자가 응하지 않자,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 죽게 한다. 이때 세자의 나이 28세였다. 결국 사도세자는 정쟁에서 노론의 희생양이 되었다. 후에 영조는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와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로 분리되어 새로운 당파의 국면을 초래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사도세자는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된다. 그리고 숙의 문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한 혐의로 작위가 삭탈되고 사저로 내쫓겼으며, 그녀의 오빠 문성국은 노비로, 어머니는 제주로 유배된다. 결국 문씨는 '문녀’로 불리며 사사되었다. 그의 무덤은 처음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릉원이라 하였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된 후 융릉으로 정해진다.

 

 

영조의 업적

· 지속적인 탕평책 추진

영조는 탕평책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1772년  과거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고,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하는 등 서원 정리한다. 그리고 같은 당파에 속하는 집안끼리 결혼을 금지시키는 '동색금혼패'를 집집마다 걸게 한다. 그 결과 왕권이 강화되고 정국이 안정되었다.

 

· 죄수의 인권 측면 

영조 시대에는 죄수의 인권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가져온다. 1725년 무릎 위에 맷돌을 올려 뼈를 으스러뜨리는 압슬형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죽이는 형벌을 금한다. 1729년 사형수에 대하여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한다. 1774년 사가에서 형벌을 가하는 것을 금하고, 판결을 거치지 않고 죽이는 남형과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경자 등 가혹한 형벌을 금지한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여 백성의 억울함을 왕에게 직접 알리게 한다.

 

· 경제적인 발전

국방의 의무를 대신하여 양민이 내던 군포 2 필을 1 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역 부담을 경감시킨다. 1725년부터 방죽을 수축하여 가뭄에 대비하고, 오각작통법과 이정의 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탈세를 방지하였으며,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고 빈농구제를 위해 마련한 환곡의 폐단을 방지하였다. 1763년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구황식물로 사용하였다. 

 

· 사회적인 발전

신분에 따른 국가의 의무사항을 분명히 하여 공사천법을 마련하여 천민에게도 의무를 부과하였다. 양인의 수를 늘리기 위해 양인 어머니와 천인 아버지 사이의 자식은 양인이 되게 하였다. 이듬해 다시 남자는 아버지의 신분으로 여자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였으며, 서얼출신도 관리가 되게 하였다

 

· 군사적인 발전

화폐주조를 중지하고 군사무기를 만들게 하고, 1729년 김만기가 화차를 고치게 하고, 수어청에서 조총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제작한 거북선보다 작고 빠른 해골선을 각 수영에 배치하게 하여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그리고 변방에 요새를 구축하고 1743년에 평양중성과 강화도 외성 구축을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 문화적인 발전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고,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여 백성들에게 반포한다. 1729년 <감란록>, 1732년 이황의 학문을 담은 <퇴도언행록> 등을 간행하였으며, 1736년에 <경국대전>을 보강한 후 <속대전>을 편찬한다. 그 후 1747년 <황단의궤>, 관리들의 필독서인 <무원록>, 1749년 <속병장도설>, 1770년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홍봉한 등의 <동국문헌비고> 등 무수히 많은 책을 편찬한다. 그리고 영조 자신이 직접 쓴 <악학궤범서문>, 자서전인 <어제자성편>, 무신들을 위한 <위장필람> 등이 있다. 그리고 영조 시기에는 실학이 확대되어 북학파의 홍대용의 <연행록>, 유형원의 <반계수록>, 신경준의 <도로고>, <훈민정음운해> 등이 편찬된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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