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22대 국왕 정조(1752 ~ 1800)의 이름은 이산(李祘), 호는 홍재(弘齋)로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혜빈 홍씨(혜경궁 홍씨)이다. <정조실록>는 총 56권 56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776년 3월부터 1800년 6월까지 24년 3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800년 12월에 시작하여 1805년 8월에 완성되었다. 편찬에는 총재관 이병모, 이시수, 서용보를 비롯하여 총 131명이 투입된다. 여기에서는 정조의 어린 시절과 등극 및 문화정치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어린 시절과 등극
· 정조의 어린 시절
정조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사도세자(장조)와 혜빈 홍씨(혜경궁 홍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1759년 8세에 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1762년 11세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어 제왕 수업에 들어간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양이 되었던 것처럼 정조 역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항상 죽음의 위험에 시달리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세손시절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으며 목숨을 유지하였으며, '개유와'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의 문화를 열심히 공부하며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살아왔다.
· 정조의 등극
1775년 정조는 24세 나이에 82세의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이듬해 1776년 3월 영조가 사망하자 25세의 나이로 왕이 된다. 그가 바로 조선 22대 국왕 정조이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고, 파당을 배격하여 새로운 인물로 친위세력을 만들어 나간다.
정조의 문화정치
· 홍국영의 세도정치
정조는 즉위 즉시 규장각을 설치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한다. 그리고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였던 정후겸, 홍인한,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하였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한다. 세손시절 자기를 경호하여 왔던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날랜 병사들로 숙위소를 창설하여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하게 한다. 따라서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여 모든 인사권을 쥐게 되었으며, 누이동생까지 정조에게 바쳐 후궁 원빈이 되게 하였다. 그 결과 문무백관과 지방 수령까지 홍국영에게 고개를 수그린다. 이른바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의 누이 원빈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경계한다. 정조는 홍국영에게 스스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홍국영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된다. 결국 홍국영은 세도정치 4년 만인 1780년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된다.
· 규장각을 통한 문화정치
정조는 홍국영의 세도정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실제로는 4년 동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모아 앞으로 펼칠 문화정치를 치밀하게 준비하였던 것이다. 규장각은 정조의 근위세력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규장각은 1776년 초기에는 이문원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와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여 출판의 업무를 주로 하였다. 그 후 1779년에는 외각에 검서관을 두어 서얼 출신의 유능한 인재들을 뽑아 조정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정조는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실시하여 각 신하들이 시험관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규장각을 실질적인 경연장으로 만들어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찬술, 편서와 간서 등 업무를 확장시킨다. 1780년 정조는 홍국영의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친정체제를 구축한 후 1781년부터는 본격적인 혁신정치의 중심으로 규장각 확대사업에 들어간다. 강화사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으로 삼고, 내규장각의 부설장서각으로 서고와 열고관을 세워 서적을 정리 보관하는 등 규장각의 청사를 신축하여 가장 규모가 큰 청사로 만든다. 그리고 규장각에 소속된 학자들을 승지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조석으로 왕을 문안하고, 사관으로서 왕의 언행을 기록하는 특권을 준다. 또한 규장각에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차적으로 부여한다. 그 결과 규장각은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으로 권력의 핵심기구가 된다. 이른바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우문지치(右文之治, 학문 중심의 정치), 작성지화(作成之化, 만들어냄으로써 발전을 꾀함)'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며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 정조의 탕평책
영조 때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조정은 다시 벽파와 시파로 나누어진다. 죽음을 당연시하는 외척 중심의 노론은 벽파로 남고, 죽음을 동정하는 남인, 소론, 일부 노론 등은 시파가 된다. 정조 때에 이르러 당쟁은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정조는 남인의 채제공을 비롯하여 실학자인 정약용, 이가환 등과 노론의 젊은 북학파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을 중용하였다. 이렇듯 정조가 남인 실학자와 노론의 북학파 출신인 시파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나가자, 벽파는 위기로 인식하고 뭉치게 된다.
· 신해박해(1791년)
한편 17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가 베이징(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1785년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 천주교 신자들이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비밀 집회를 가지다가 도박 단속을 위해 순찰 중인 형조의 포졸들에게 적발된다. 평택현감으로 있던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은 삭탈관직 당하고, 양반 출신인 정약전, 정약용 등은 석방되고 중인 출신 김범우만 투옥되어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유배지에서 순교한다. 이때 정약용도 일시적이나마 배교했으나 훗날 천주교인들과 은밀하게 교제를 재개한다. 그 후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사는 정약용의 외가쪽 친척인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르고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다. 외사촌인 권상연도 이를 비호하고 나선다. 이에 조정은 제사 거부는 효와 충을 거부하는 행위로 보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국문하여 참수형을 한다. 이 사건을 '윤지충 모친상 사건' 또는 '진산사건'이라 한다. 그러자 조정은 서구문화와 천주교의 수입을 공격하는 공서파(벽파)와 이를 신봉하고 묵인하는 신서파(서파)로 나뉘어 정면 충돌한다. 그리고 논란 끝에 천주교를 수용불가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며, 조정의 대세는 벽파로 기울어진다. 이 사건을 '신해박해'라고 하며 이로부터 천주교 신자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된다.
· 주문모 밀입국 사건(1795년)
그 후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밀입국하여 서울 북촌 최인길의 집에서 비밀리에 포교하다가 발각된다. 이 사건으로 주문모는 탈출하고 최인길 등은 체포되어 고문 끝에 순교하고,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은 유배를 가게 된다. 다시 한번 벽파들은 기세를 떨치게 된다. 그 후 시간이 흘러 1799년 남인 채제공이 죽자 남인은 완전히 위축된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자 남인은 거의 축출되고, 시파는 일부 노론의 외척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로써 약 24년에 걸친 정조의 문화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 정조의 문화정치
정조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등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동문휘고>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한다. 또한 정조의 문화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에게도 영향을 주어 '위항 문학'을 낳아, 그들 만의 독자적인 시사인 '옥계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한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화, 글씨에는 동국진체 등 중국이 아니라 독자적인 한국 고유의 풍이 유행하게 된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정조시대는 병자호란 이후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없어지고 민족주의의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양반, 중인, 서얼, 평민 등 모두가 문화에 관심을 두는 문화적 황금시기인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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