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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조선왕조실록

제22대 정조실록 2 - 정조의 사망과 가족들 및 위대한 실학자들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8. 17.

조선의 제22대 국왕 정조(1752 ~ 1800)의 이름은 이산(李祘), 호는 홍재(弘齋)로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혜빈 홍씨(혜경궁 홍씨)이다. <정조실록>는 총 56권 56책으로 구성되며 그의 재위기간 1776년 3월부터 1800년 6월까지 24년 3개월 동안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편년체로 적은 역사서이다. 실록의 편찬은 1800년 12월에 시작하여 1805년 8월에 완성되었다. 편찬에는 총재관 이병모, 이시수, 서용보를 비롯하여 총 131명이 투입된다. 여기에서는 정조의 사망과 가족들 및 위대한 실학자들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정조

 

정조의 사망과 가족들

· 정조의 사망

이와 같이 문예 부흥에 앞장섰던 정조는 등에 난 종기로 쓰러져 연훈(수은) 처방으로 치료 중 악화되어, 1800년 6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야사에서는 독살설도 나돌기도 한다. 그의 능은 건릉으로 생전에 유언을 따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융륭) 근처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하게 된다. 

 

· 가족들

정조는 효의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5명의 부인에게서 2남 2녀의 자식을 가진다. 효의왕후 김씨에게는 자식이 없고, 의빈 성씨에게서 1남(문효세자:일찍 사망), 수빈 박씨에게서 1남 1녀(순조, 숙선옹주), 원빈 홍씨, 화빈 윤씨에게서 1녀(일찍 사망)를 얻는다. 

 

· 효의왕후 김씨(1753 ~ 1821)

좌참찬 김시묵의 딸로 1762년 10세에 세손비로 책봉되어 1776년 정조가 왕이 되자 왕비로 책봉된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빈 홍씨를 지극히 모시고, 성품이 고결하여 궁중의 물품은 일체 사가에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1821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화성시에 있다. 

 

 

위대한 실학자들

· 실학이란?

'실학'은 조선 후기에 대두된 사상으로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실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여 새로운 시대를 구현하려고 하는 '현실 개혁적 사상'을 말한다. 실학사상은 이수광, 유형원 등으로 시작하여 이익, 안정복, 박세당, 홍대용을 거쳐 박지원, 정약용, 이덕무, 박제가에 이르러 집대성되고 19세기말 개화사상가에 의해 재발견된다. 

 

· 북학파의 거장 연암 박지원(1737 ~ 1805)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문필가로, 호는 연암(燕巖)이다. 그는 1737년 노론 명문 집안 출신으로 한성 서쪽 반송방의 야동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부 박필균의 손에 가난하게 자랐으며, 1752년 16세에 이보천의 딸과 혼인을 하고 처가 집안에서 글과 학문을 배우게 된다. 1765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그 후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몰두한다. 1768년 백탑 근처로 이사 가서 당대 최고의 학자 홍대용, 이덕무 등과 토론을 하며 친분을 쌓았다.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을 수행하여 청나라 북경을 방문한 후 그곳의 발전된 문물에 큰 충격을 받고 이때 보고 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 <열하일기>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 <열하일기>는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부터 봉천과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다시 열하에서 북경으로 되돌아오는 8월 20일까지 두 달 동안의 여행 경험을 날짜별로 일기 형식으로 적은 책으로 청나라 방문 후 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허생전>은 사회 풍자 소설로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고 중상주의적 사상을 통하여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 방안을 제시한다. 또한 <양반전>에서는 조선 봉건사회의 와해와 기득권을 주장하며 군림하는 사대부 계층의 문제와 한계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 외에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안설> 등을 저술한다. 적대적이기는 하지만 청의 문물이 우리의 현실을 풍요롭게 한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의 현실주의적인 사상은 노론들의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정조대에 이르러 젊은 선비들에게 받아들여져 북학파를 형성하는 중심 사상이 된다. 그의 현실적인 개혁사상은 <허생전>, <민옹전>, <광문자전>, <봉산학자전> 등의 소설 속에 잘 녹아 있다. 박지원은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본받아 수레와 도로를 사용하여 상공업을 발달을 중요시하는 중상주의 사상으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실학의 최고봉 다산 정약용(1762 ~ 1836)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문신, 저술가, 시인, 철학자이며 호는 다산(茶山)이다. 그는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남인인 아버지 정재원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9살인 1770년에 어머니를 여의고, 15살인 1776년 승지 홍화보의 딸고 결혼을 한다. 그의 외조부는 문인과 화가로 유명한 윤두서이고, 첫째 형은 정약현, 둘째 형은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이고, 셋째 형은 정약종으로 그의 형제 모두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다. 정약용은 형 정약전의 친구 이승훈, 이익의 증손인 이가환 등과 친밀한 교우를 가진다. 1782년 21세에 과거에 나가 벼슬을 오른 뒤 1784년 정조의 부름을 받아 <중용>을 강의하면서 정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며, 1789년 배다리와 가교를 만들었으며, 1791년 수원화성 수축에 거중기를 제작해 공사 기간을 단축한다. 1793년 왕의 특명으로 경기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 지방의 서용보 일당의 범죄사실을 밝혀 그를 해직케 한다. 1797년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되어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추앙을 받으며, 천연두가 유행하자 의학서 <마과회통>을 편찬하여 많은 환자들을 구한다. 1799년 중앙으로 돌아와 병조참지에 오른다. 그러나 정적들이 천주교인으로 몰아가자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서학에 능통한 천주교 신부와 신자를 만났다고 해명하는 '자명소'와 '사퇴 건의서'를 함께 정조에게 제출하고 1800년 봄에 낙향한다. 1800년 6월 정조가 사망하자 조정은 노론 벽파가 완전히 장악하고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정약전, 정약종, 이가환, 이승훈 등은 투옥되어 이가환, 정약종, 이승훈 등은 죽고 정약용은 유배를 가게 된다. 1801년 10월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압송된다. 이 사건으로 서학 관련자는 사형이 되고 정약용과 형 정약전은 공적을 인정해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어 그곳에서 사망하게 된다. 정약용은 1803년 유배지에서 만덕사 혜장선사를 만나 불교를 알게 된다. 그 후 1808년 다산 초당으로 옮겨 11년 동안 이곳에서 실학사상을 체계화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을 남긴다. 이때 <목민심서>, <경세유표>, <논어고금주> 등을 저술한다. 그리고 1818년 유배에서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며 <흠흠신서>, <상서고훈> 등 많은 책을 집필한다. 그 후 1836년 2월 22일에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정약용은 조선 사회의 개혁과 발전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는 약 508여 권의 저서를 남기지만 대부분 없어지고, 1938년 신조선사에 의해 <여유당전서>가 출간된다. 그는 향촌 단위의 방위 체제와 민본적 왕도 정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정전제 여전론토지 제도 개혁을 주장하여 유형원, 이익 등과 더불어 실학의 중농주의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 이상적 개혁론자 초정 박제가(1750 ~ 1805)

박제가(朴齊家)는 승지 박평의 서자이며, 조선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서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자는 재선(在先), 호는 초정(楚亭)이며, 어린 시절부터 시, 서, 화에 뛰어났으며,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운다. 그는 서얼 출신으로 과거에는 응시할 수 없었고, 당대의 석학인 이덕무, 유덕공 등과 친문을 나누며 북학에 빠진다. 특히 아홉 살 위인 이덕무와 평생의 벗으로 지낸다. 1776년 나이 27세에 정조가 즉위하여 서얼차별을 없애는 '서얼허통절목'을 발표하자 청나라 북경에 갈 수 있게 된다. 박제가는 1778년 이덕무와 함께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3개월 간 청나라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본받아 생산기술을 향상하고, 통상 무역을 통해 이용후생을 실현할 것을 역설한다. 그는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화폐 유통과 서양인의 초빙을 주장하며, 상업·수공업·농업 전반의 생산력 발전을 추진했다. 그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을 장려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1779년 이덕무, 유덕공, 서이수 등의 서얼출신들과 함께 규장각의 검서관이 된 후 13년간 규장각에 머물면서 많은 책을 탐독하고, 국내외의 학자들과 사귀며 책을 교정하고 간행한다. 박제가는 네 차례에 걸친 청나라 여행을 통해 국제적 안목을 갖춘 글로벌 지식인이었으며, 그의 사상과 업적은 조선 후기의 경제와 사회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자 노론 벽파들은 천주교 금지를 명분으로 삼아 남인 일파들을 숙청하고,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천주교를 인정하자는 실학파 학자들을 대거 제거한다. 노론 집권층은 1801년 신유사옥 때 윤행임 반역사건을 조작하여 박제가에게 반역혐의를 씌워 두만강변 종성으로 유배를 보낸다. 1804년 박제가는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지병으로 56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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