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회인들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혼란한 유럽사회에서 세상의 부조리성과 인간의 비합리성을 겪고 불안과 고통에 대하여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실존 문제인 불안과 고통에 관한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은 세간들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그는 개인이 겪어야 하는 절망에 대하여 "우리가 실존으로 존재할 때 진정한 삶을 살게 된다"라는 기독교에 기반을 둔 실존주의 철학을 주장한다. 지면관계상 두 차례로 나누어 여기에서는 쇠렌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의 키르케고르의 철학의 개념과 실존의 세가지 단계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작가 소개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1813 ~1855)는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실존주의 철학자, 신학자, 시인, 사회비평가다. 키르케고르는 사실상 실존주의 시조 쇼펜하우어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관념론과 루터교회의 형식주의에 반대한다. 키르케고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에 속하는 사르트르나 니체와는 다르게 ‘기독교 실존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키르케고르는 철학, 신학, 심리학,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어 현대 사상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30세에 쓴 처녀작인 <이것이냐 저것이냐>, <공포의 전율>,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이 있다.
키르케고르의 철학개념
· 아이러니(irony)
아이러니는 '예상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 또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 실제 사이의 괴리'를 말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를 들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아이러니 개념을 이용하여 헤겔의 변증법 역사 철학을 비판하다. 키르케고르에게 아이러니란, 도덕적 또는 종교적 이상에 도달하려고 시도할 때 생겨나는 틈새를 말하는 것으로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 사이의 경계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역설(paradox)
역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맞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나 방법'을 말한다. 즉 두 개의 모순된 것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키르케고르는 믿음을 사용하고 있다. 믿음에는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 이상의 도약이 필요하며, 이 도약은 불확실성을 포용하고 실패 또는 부조리의 가능성을 수용하는 역설적인 행위라고 믿는다. 이 개념은 현대 철학과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영감과 논쟁의 원천이 되고 있다.
· 부조리(absurd)
부조리는 말 그대로 ‘말이 되지 않는 것’, ‘논리적 이해 불가능한 것’ 등을 의미합니다. 4.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부조리’는 이해력의 바깥에 있는 것이며 진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겠지만, 믿음의 영역에서는 오직 부조리의 힘에 의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키르케고르는 주장한다.
· 죄(sin)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죄는 종교적인 의미의 죄를 말하는 것으로 사회적, 도덕적 잘못과는 구별된다. 즉 한 개인이 잘못을 범하여 신(절대자) 앞에 나설 때 느끼게 되는 죄의식의 감정을 말한다. 따라서 종교가 없거나 절대자를 가정하지 않는 곳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개념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실존을 가진 자는 죄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죄성이 문제가 된다. 즉 절대자와 자아의 관계성에서 올바름과 어긋남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의미의 죄는 '절망에 빠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절망에 빠지는 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믿음(faith)
키르케고르는 기독교 실존주의자로서 신앙이란 단순히 신의 존재를 믿는 문제가 아니라 신과의 인격적 관계를 포함한다고 믿는다. 키르케고르에게 믿음은 객관적인 추론이나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이다. 그는 믿음은 본질에 대한 순수한 의식, 순수한 사유로 본다. 믿음의 실재를 제거하고 보편적인 이해체계로서의 종교를 인식하는 헤겔철학과 달리 믿음의 정신이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이 ‘모순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이 키르케고르의 철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곧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는 역설이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절대자 앞에 홀로 선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 실존적 권태
권태에 대해서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에게 열정 없이, 일도 없이, 기분전환도 없이, 열의도 없이, 완전한 휴식 중에 있는 것보다도 더 참기 힘든 것은 없다. 이렇게 된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님을, 포기를, 부족함을, 의존성을, 무기력함을, 공허를 느끼게 된다. 비록 의식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권태와 우울함과 슬픔과 눈물과 후회와 절망이 튀어나올 것이다."라고 말한다. 파스칼의 권태에 대한 언급처럼 키르케고르 역시 그의 책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일을 한다고 해서 권태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들 자신은 권태를 느끼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그들이 권태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진정한 관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들이 권태를 극복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권태로워하고 있다."라고 인간의 실존적인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 권태로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실존에 대한 권태는 종교적인 의미로 ‘실존적 권태’에 대한 회피가 더 이상 ‘신을 추구하지 않는 상황’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신’이라는 존재가 삶에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심각한 종교적인 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존의 권태는 실존적이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극복될 수 있으며, 이런 의지는 점진적으로 실존의 단계를 상승시키며, 이것이 곧 ‘실존의 질적인 도약’으로 '심미적 실존 → 윤리적 실존 → 종교적 실존' 단계로 도약한다. 키르케고르에 있어서 권태를 극복한다는 것이 곧 실존의 의미이며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인 동시에 나아가 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임을 말하고 있다.
실존의 세 가지 단계
· 실존이란?
'실존'이라는 것은 확고하고 분명한 본질에 대립되는 용어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양한 관계성 중에 존재하는 개별자를 말하며 항상 변하고 진행 중에 있어 안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이야기한다. 키르케고르는 "실존은 가능성이고 실현해야 할 과업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실존주의자는 무엇보다 한 개별자로서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절대적인 관심으로 파고드는 사람이다. 인간의 실존은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현실의 일들에서 절대적인 삶의 의미로 다가갈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 ‘절대자’와 마주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크게 1. 심미적 실존, 2. 윤리적 실존, 3. 종교적 실존 세 가지로 구분되며, 실존의 권태에 대한 자각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실존의 단계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세 가지 실존의 단계는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하나의 단계로 나아가면서 존재함의 의미가 확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
1. 심미적 실존(Aesthetic Existence)
심미적 실존은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미적 단계로 인간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고 다른 실존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관문과도 같다. 즉 심리적 실존이 충만하지 못하면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의 삶으로 제대로 도약할 수 없다. 따라서 심미적’이라는 것은 감각적, 감성적 차원에서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과 관계된다. 이러한 심미적 태도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1. '직접적 심미주의'는 동물적인 향락과 쾌락에 도취되어 사는 삶으로, 그러한 삶은 전적으로 필연에 의해 속박되어 있으며 가능성으로서의 인간 존재를 상실한다. '심미적 실존' 속에 '직접성의 단계', '유혹자의 단계', '자기 속의 고립된 환상에 폐쇄된 단계'가 있다. 2. '반성적 심미주의'는 인간이 예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세계를 무시하고, 오직 음모를 꾸미고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2. 윤리적 실존(Ethical Existence)
윤리적 실존은 윤리적 원칙으로만 인생을 살려는 단계를 말한다. 과거 윤리에 대하여 주장한 다음과 같은 철학자들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윤리적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윤리를 '보다 큰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고려하였다. 파스칼도 <팡세>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윤리적 혹은 도덕적으로 되는 게 힘들더라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윤리적 실존이란 선과 악이 관련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추구하기 위한 내적인 삶을 가지는 것이며 지속하는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진정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내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 즉 자기 동일성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3. 종교적 실존(Religious Existence)
이것은 실존의 최종 단계로, 하느님 앞에 홀로 서있는 단계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참모습이 신 앞에 서는 단독자에 있다고 보았다. 이 단계에서는 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즉 인간은 근원적으로 ‘신성 혹은 절대’, ‘무한 혹은 영원성’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이는 확실성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가능성으로서만 주어진다. 그리고 인간은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부정(초월)을 감행하여야 한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쇠렌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2 - 세가지 절망, 영원성, 파스칼 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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