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혼란한 유럽사회에서 사람들은 세상의 부조리성과 인간의 비합리성을 겪고 불안과 고통에 대하여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이 때 고통과 혼란에 대하여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에 기반을 둔 실존주의 철학을 주장한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지면관계상 다하지 못하고 남은 부분인 쇠렌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의 세가지 절망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세 가지 형태의 절망
· 절망이란?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자기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모든 절망을 위한 공식이다. 절망은 절망에 빠진 사람인 자기를 먹어치울 수 없다는 것에서, 그것이 곧 절망에 있어서의 모순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에서 인간 안에 영원한 것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한 것이 절망의 본질이며, 자기에게 있어서의 병인 이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절망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절망을 '자기 자신의 병'으로 보고 그 유형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1. 자기 자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형태의 절망
대다수 현대인의 삶에서 인간이 영원성과의 관계가 있다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유물론적, 무신론적인 관점에서는 인간에게 어떤 영원성과의 관계나 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고 결코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상, 이데아, 선, 정의는 '인간의 무지나 나약함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하며, 진실은 오직 물질과 신경의 조합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유물론자의 심리에서는 인간이란 결코 이러한 ‘이상적인 것’, ‘이데아적인 것’, ‘선한 것’ 혹은 ‘의로운 것’에는 도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절망이 존재한다.
2.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형태의 절망
첫 번째 절망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신의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이 무엇이며 어떤 존재로 되어야 하는가를 알고 있지만, 그 어떤 이유로 이러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판단하거나 나아가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매력적인 세속의 가치들을 포기할 수 없어 의지로 실존 추구를 포기하고 ‘허상’의 자신을 추구하게 되는 경우이다. 일체의 신적인 것을 제거하고 오직 인간 스스로가 작은 신이 되고자 하는 것으로 가장 심각한 정도의 ‘절망’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절망을 최초로 감행하였던 존재는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되고자 자신의 직분을 이탈한 대천사 ‘루시퍼’를 그 예로 든다.
3.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형태의 절망
앞의 두 가지 절망은 인간의 모든 노력이 결국 ‘구원’이나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절망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진정한 인간의 위치나 처지를 자각하고 순수하게 절대자 앞에 나서는 개인(단독자)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 절망이 ‘무지’나 ‘무의식’에 의한 것이라면, 두 번째, 세 번째 절망은 ‘의식적’이며, ‘의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인이 되고자’한 니체나, 인간을 ‘자유’라고 선언한 사르트르나 푸코 등이 이 두 번째 절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에 대하여 말한 다음과 같은 철학자들이 있다. 블레즈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에서 "인간은 절망할 수 있기에 위대하다. 인간은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온 자연을 통틀어 가장 연약한 존재다. 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비참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비참하지만, 비참하다는 점을 안다는 데 위대함이 있다."라고 절망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키르케고르도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동물보다 우수하다는 장점이다. 이 병에 주의하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자연 그대로의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장점이다. 이 병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지극한 축복이다."라고 그의 책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비참함을 알고 절망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무엇인가?
· 죽음에 이르는 병
키르케고르는 그의 책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할 때 죽음은 오히려 그 자체가 삶의 과정이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때는 사람은 간절히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더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죽음을 바라게 된다. 위험이 너무나 커서 죽음이 희망이 될 정도로 클 때, 그때 절망은 죽을 수조차도 없다는 무력함이다. 이 최후의 의미에 있어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말한다. 즉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영적인 생명’과 ‘의미 있는 삶’을 상실할 위험이 있는 '절망에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 진정한 삶의 시작은?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인이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만일 인간이 가령 병으로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망으로 죽는 것이 불가능하며, 절망의 죽음은 계속 삶으로 변화하여 절망에 빠진 사람은 죽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다 절망을 경험하며 절망은 진정한 자기가 될 수 있는 기회인 실존의 삶의 기회를 준다. 따라서 진정한 삶은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는 사후에 맞이하게 될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생각이 현재에 있어서 영원성과 맞닿아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쇠렌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키르케고르는 자기비판과 내적 성찰에서 존재로서의 자아의 중요성과 자아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강조했다. 그는 간접적인 의사전달방식을 사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관점을 파악하기 어렵게 하며, 기독교 교회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아도르노,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와 무신론적 철학자인 사르트르 그리고 하이데거 등 많은 철학자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들은 키르케고르의 윤리적, 종교적 단계에서 신앙의 도약에 대하여 비판한다. 특히 사르트르는 신의 존재를 반대하는 논쟁을 제기한다. 아무튼 쇠렌 키르케고르의 사상 중 분노, 부조리, 절망, 개인의 중요성 등의 개념은 20세기 철학과 신학 그리고 문학 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후 그는 실존주의 선구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며, 루터 교회에서는 교사로서 그의 사망일인 11월 11일에 기념일을 지내고 있다.
※ 쇠렌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1 - 부조리, 역설, 권태, 세 가지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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