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에서 책사 사마의가 유배를 가게 되자, 만반의 준비를 갖춘 제갈량은 황제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다. 황제로부터 허락을 받은 제갈공명은 30만의 군사를 이끌고 227년부터 234년까지 한중에 상주하면서 7년 동안 여섯 번에 걸쳐 북벌을 단행한다. 제갈공명이 북벌을 단행하자 위나라의 조예(명제)는 사마의를 장안으로 불러들인다. 여기에서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제갈공명의 북벌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차 북벌
· 제갈량의 연전연승
228년 봄 제갈량은 사곡(옹주 서부)과 기곡(장안의 서쪽)으로 동시에 진격한다. 이때 사곡의 본진은 제갈량이 지휘하고, 기곡에는 조자룡의 별동대 출정시킨다. 조자룡은 연전연승을 하고, 제갈량은 옹주 일대의 호족들의 도움으로 남안, 천수, 안정 3군을 점령하게 된다. 이때 강유가 귀순한다. 위연은 1만의 병사로 진령산맥을 넘어 무능한 관중도독 하후무가 지키는 장안을 급습하는 "자오곡 계책"을 간하나 제갈량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 귀양 간 사마의의 복귀
그러자 위나라의 명제(조예)는 조진을 도독으로 임명하고 장안과 가까운 기곡을 방어하게 한다. 이후 명제는 직접 관중으로 출병하고, 귀양 보낸 사마의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15만의 대군을 주어 가정으로 보내 촉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한다. 이로써 제갈량이 고민에 빠지자, 젊고 병법에 능하며 협상을 잘하는 마속이 자원하여 가정을 지키겠다고 한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가정을 방어하게 한다.
· 읍참마속
하지만 마속은 협곡 길목에 영채를 세워 한 달 동안 방어하라는 제갈량의 지시를 무시한 채 적군을 공격하기 유리한 산 꼭대기에 영채를 짓고 주둔한다. 가정에 도착한 사마의는 산꼭대기에 영채를 세운 촉군은 비웃으며 산을 포위하고 수로를 끊어 버린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자 촉군은 갈증에 빠지고 싸울 힘이 없어져 탈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사마의는 산중턱에 불을 놓아 화공으로 산꼭대기에 있는 촉군의 영채를 불태운다. 겨우 목숨을 구한 마속과 남은 군사들은 탈출하여 도망간다. 그 결과 왕평과 고상이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보급로가 끊긴 촉군 본대는 한중으로 퇴각한다. 기곡에서는 조자룡의 별동대가 조진에게 밀려 한중으로 퇴각하기에 이른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은 실패로 끝난다. 이후 제갈량은 군법에 따라 패전의 책임을 물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처형한다. 여기에서 '울면서 마속의 목을 친다' 즉 '대의를 위해서는 사사로운 감정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읍참마속(泣斬馬謖) 또는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게 된다. 제갈량은 황제 유선에게 보고하고 스스로 우장군으로 지위를 낮추고, 재상의 권한은 유지한다.
· 제갈량과 거문고
가정에서 마속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제갈공명은 군사 5천을 끌고 군량미 핵심통로인 서성으로 간다. 서성에서 사마의의 15만 군사가 가까이 왔다는 보고를 듣고 제갈공명은 병사들에게 군량을 가지고 양평관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군량을 절반 정도만 옮겼는데 벌써 사마의의 군사가 도착한다. 그러자 제갈공명은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앞에는 병사 20명을 백성 옷으로 입히고 비질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는 거문고를 가지고 와 성문 위 누각에 앉아 거문고를 뜯는다. 사마의는 이 광경을 보고 적의 매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물러간다.
2 ~ 5차 북벌
· 2차 북벌
유비의 오호장군 중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조자룡은 1차 북벌이 실패한 후 병을 얻어 사망한다. 그 해 가을 제갈량은 진창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진창은 조진의 부하 학소가 불과 1천 명의 병력으로 20일에 걸친 촉군의 공격을 막아낸다. 위의 조진이 낙양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출병하고 식량까지 떨어지자, 제갈량은 왕쌍의 추격군을 격파하고 한중으로 돌아간다.
· 3차 북벌
229년 제갈량은 진식에게 익주의 방어에 용이한 무도와 음평을 기습하게 한다. 위나라 옹양주도독 곽회가 진식을 맞아 싸우다 제갈량의 본진이 건위로 진격하자, 곽회는 무도와 음평을 포기하고 퇴각한다. 하지만 겨울이 오자 제갈량은 한중으로 귀환하여 기회를 엿보게 된다. 무도와 음평을 점령한 공으로 제갈량은 승상직에 복직한다.
· 4차 북벌
230년 위의 조진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조진의 본진은 사곡에서 한중을 공격하고, 사마의는 상용, 장합은 무도를 공격한다. 이에 제갈량은 성고에 본진을 두고 방어한다. 이후 계속된 여름 장마로 도로가 끊기고, 보급이 어려워지자 위군은 퇴각한다. 그해 가을 제갈량은 위연에게 강중으로 진출하게 하여 곽회의 위군을 상대하여 양계에서 대파한다.
· 5차 북벌
231년 제갈량은 다시 기산으로 진격한다. 이때 위나라는 조진이 병사하고, 사마의가 진서대도독으로 기용된다. 5차 북벌부터 제갈량은 군량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험준한 산악지역에서 쉽게 군량을 운송하는 도구 목우(소를 닮은 바퀴가 하나 달린 나무로 만든 수레)와 유마(말을 닮은 바퀴가 네 개 달린 사륜거)를 발명하여 보급의 수송력을 높이고, 둔전을 강화한다. 제갈량은 호로곡에서 장인 1천 명에게 목우와 유마를 수백 개를 은밀히 만들게 한다. 그 후 식량 보급이 원활하게 되자 이를 이상히 여긴 사마의가 병사를 시켜 목우유마를 빼앗아 와 똑같은 목우유마를 수천 개를 만들어 식량보급에 활용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제갈공명은 군사 1천 명을 보내 위나라 군사로 위장을 하여 보급하는 수송병에게 가 도와주는 척하면서 목우유마의 손잡이를 돌려놓고 돌아온다. 그러자 목우유마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때 촉군이 습격하여 와 위군은 버리고 도망을 간다. 촉군들은 목우유마의 손잡이를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고 식량을 싣고 유유히 사라진다. 제갈공명은 위군으로부터 군량미를 빼앗은 것이다. 촉군은 상규에서 비요, 곽회를 격파하고 노성에서 촉군과 위군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다. 이때 제갈량은 사마의를, 왕평은 장합을 막는다. 노성 전투 이후 군량미를 한번 빼앗긴 사마의는 퇴각하여 장기전으로 수비만 하는 견벽거수(見辟擧守: 벽을 바라보며 수비만 함) 전략으로 수정하고 수비만 한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병참을 담당한 이엄의 태업으로 다시 군량이 부족하여 퇴각하게 된다. 사마의의 추격 명령을 받은 장합은 촉군을 추격하다가 목문도에서 매복에 걸려 전사한다. 제갈량은 이엄을 면직하여 재동군으로 유배 보낸다.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과 죽음
· 사마의의 천우신조
세월이 흘러 다섯 번째 출정 후 삼 년 동안 전쟁 준비를 한 제갈량은 234년에 34만의 대군을 이끌고 마지막 6차 북벌을 위해 기산으로 향한다. 촉군은 오장원에 주둔하고 위군과 대치하며 식량을 비축하고 지역 주민들과 친하게 지낸다. 그런 중에 총 도독 사마의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쪽은 기산을 공격하고, 사마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기름통과 짚단을 준비하여 호로곡의 군량을 불태우러 출동한다. 그러나 제갈공명을 산 위에서 이를 다 보고 있다가 군사의 7할은 기산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자신이 직접 지휘한다. 사마의와 정예병들이 호로곡에 도착하여 군량미 창고를 보니 기름냄새가 풍기며 군량대신 장작만 가득 들어 있었다. 사마의는 함정이라고 느낀 동시에 골짜기 가득 북소리와 함성소리가 울려 퍼지고 불화살과 횃불이 날아든다. 제갈공명이 오래전부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호로곡이 큰 화마에 사로잡히자 제갈공명은 이제 북벌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사마의는 옷이 불타고 연기를 마시며 두 아들을 껴안고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엄청난 비가 쏟아져 내린다. 불이 꺼지자 비를 맞으며 사마의는 도망쳐 영채로 달아난다. 제갈공명은 "진정 하늘은 우리 촉의 편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통탄한다. 영채로 도망친 총도독 사마의는 제갈량의 약점이 군량미 보급과 오래 동안 수도를 비워 내분이 생기는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장기전으로 지연하는 견벽거수 전략을 고수한다. 그러자 제갈량은 위군이 전투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 도발하나, 사마의는 끝까지 수비로만 일관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 제갈량의 죽음과 부활
호로곡 전투에서 사마의가 살아 돌아가자 제갈량은 몇 날을 식음을 전폐한다.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린 제갈량은 결국 4개월 간의 대치 끝에 234년 10월 제갈량은 그의 나이 54세에 진중에서 병사한다. 제갈량이 죽자 촉군은 양의의 지휘아래 한중으로 퇴각한다. 이 사실을 안 장수들이 사마의에게 "지금이 촉군은 칠 시기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몇 번이나 속아 죽을 뻔하여 이번에는 속지 않으리라 다짐을 한다. 사마의는 퇴각하는 촉군의 영채 가까이 가보니 수레에 깃털부채 학우선을 들고 와룡관을 쓴 제갈공명이 앉아 있었다. 사마의는 죽은 줄 알았던 제갈량이 살아있는 것을 보고 "퇴각하라, 퇴각하라!"라고 외치며 퇴각한다. 그러자 촉군은 불화살을 쏘고 병사들은 화살을 맞으며 도망을 간다. 제갈공명이 죽으면서 유언으로 "목각으로 나를 만들어 수레에 태워 보이는 곳에 두라."라고 하였던 것이다. 촉군이 완전히 퇴각한 후에야 사마의는 속았다는 것을 알고 뒤늦게 다시 추격하나 실패한다. 이를 두고 후세사람들은 "죽은 공명이 부활하여 살아 있는 사마의를 무찔렀다"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왕평과 마대의 활약으로 진압한다. 제갈량의 영구는 성도로 운구되어 한중의 정군산에 매장된다. 자손들에게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농토 15경을 남겼다고 한다.
북벌 실패원인
7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친 제갈량의 북벌이 실패한 원인은 첫째, 서천은 지형이 험준하여 수비에는 좋으나 공격하기에는 매우 불리하였다. 왜냐하면 손권에게 형주를 잃은 촉나라는 서천에서 한중을 지나 장안까지 공격해 나가야 했으므로 지형이 험준하여 식량 보급 등 지원이 어려웠다. 둘째, 내부에 적이 있었다. 마속과 같이 명을 따르지 않거나 제갈공명이 황제의 자리를 탐하다는 중상모략으로 전투 중에 황제 유선에게 불러가기도 한다. 셋째, 제갈공명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사마의의 지연전략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제갈공명이 30만의 군사를 이끌고 227년부터 234년까지 장장 7년 동안 6차례에 걸쳐 행해진 북벌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중에 실제로 사마의는 1차 북벌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나머지 모두 참가하였으며 총지휘는 두 번을 하였다. 따라서 1차 정벌에 사마의가 15만 군사를 이끌고 가정에서 싸웠다는 것은 나관중의 창작하여 만든 허구의 이야기이다. 실제는 위나라 용장 장합이 5만 군사를 이끌고 가정에서 싸워 산꼭대기에 영채를 치고 있는 마속을 포위하고 화공으로 공격하여 이긴 것이다. 제갈공명이 죽고 나자 천하는 사마의의 세상이 된다. 위나라에서는 황제 명제(조예)가 일찍 죽자 조방이 여덟 살에 황제가 된다. 사마의는 황제의 실권자로 권력을 누리다가 72세에 눈을 감는다. 사마의가 죽자 그의 아들 사마소가 권력을 물려받는다. 그로부터 12년 후 사마소는 촉나라 유선을 공격하자 유선은 항복하고 자리에 물러나 낙양에서 여생을 보낸다. 그 후 2년이 지나자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실권을 물려받아 조조의 손자 조환으로부터 황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된다. 그리고 사마염은 오나라까지 통합하여 천하를 통일한다(AD 280). 후세사람들은 사마염의 진나라를 서진이라 부른다. 이것으로 <삼국지> 100년 간에 걸친 영웅호걸들의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나는 "세상에는 영원한 강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뇌리에 떠올려 본다.
※ 진수의 삼국지 구성과 개요, 장각 황건적의 난, 도원결의, 십상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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