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 주왕을 숭상하고 외부의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 '계절존망(繼絶存亡 : 망해가는 주나라의 종묘와 국통을 다시 이어 줌)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대의명분이다. 이것을 가장 잘 지킨 패자정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송양공을 꼽고 있다. 그는 지나치게 명분을 추구하다가 현실성이 없는 이상에 빠진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명분에 치우쳐 부상을 당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 된다(홍수 전투).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송양공을 가리켜 '송양지인(宋襄之仁 : 지나치게 인정이 많아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 현실성 없는 이상에 빠진 사람을 가리키는 사자성어)'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세 번째 춘추오패 송양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송양공의 생애
송양공이 왕위에 오른 후 얼마되지 않아 춘추오패인 제나라 환공이 죽게 되자 제나라 왕위계승문제가 벌어지게 된다. 이때 간신 역아와 수조는 환공의 유언(원래 공자 소를 왕위에 올리는 유언)을 조작하여 후궁 장위희의 아들 공자 무휴를 왕위에 올리자 간신 개방과 공자 반은 위나라로 망명하고, 공자 소는 송나라로 망명한다. 후에 공자 소는 송 양공에게 군사를 빌려 공자 무휴를 공격하여, 공자 무휴와 간신 수조를 잡아 참수형에 처한다. 그가 후에 제나라 효공이다. 제나라 환공이 죽은 후 환공의 아들인 무휴, 소, 반, 상인 등이 골육상쟁을 벌이며 차례로 왕위에 오른다. 결국 제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혼란한 시대상황에 송양공이 어떠한 정치를 펼쳤는지 알아보자.
· 송양공의 즉위
송양공(宋襄公, ? ~ 637)은 춘추시대 송나라의 군주로 송환공의 아들이다. 송양공은 세 번째 춘추오패로 평가되고 있다. 송환공이 죽은 후, 서자인 이복형 목이가 왕위를 거절하여 송양공이 왕이 된다. 그가 즉위한 후 목이는 재상이 된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송양공은 즉위하자마자 제나라 환공이 주최하는 제후들의 회의인 회맹에 참석한다.
· 송양공의 정치
먼저 송양공은 군사를 내어 주어 공자 소가 제나라 왕이 되게 한다. 그리고 송양공은 자신을 춘추시대 패자라고 착각한다. 그리하여 BC 641년 회맹에 늦게 참가한 증나라 군주를 잡아 삶아 죽인다. 그러나 초나라가 주최하는 가을 회맹 때 목이는 초나라의 함정이라며 참석하지 말 것을 간하였으나, 송양공은 회맹은 군주들이 비무장으로 참석하는 회의이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회맹의 맹주로서 위엄을 지키려고 참석하여 결국 초나라 성왕의 포로가 된다. 그때 초나라는 항복하지 않으면 송양공을 죽이겠다고 하였으나 송나라는 굴하지 않고 목이를 왕으로 추대하고 저항하였다. 이에 초나라는 죽일 명분이 없어 결국 송양공을 풀어 준다. 송양공이 풀려나자 목이는 다시 그를 왕으로 모신다. 그 사건 이후 송양공은 재상 목이가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복수를 하려고 초나라 동맹국인 정나라를 치게 되자 초 성왕과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 전쟁이 유명한 홍수 전투이다.
홍수 전투
초나라의 군대는 대군이고 그에 비해 송나라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이었다. 송나라의 군대가 홍수에 먼저 도착하였으며, 초나라의 군대는 거의 무방비상태로 강을 건너야만 했다. 이때 재상 목이는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는 동안 기습하면 이길 수 있다고 간언 한다. 그러나 명분에 빠진 송양공은 "군자는 어떤 경우라도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을 하면 안된다."라고 말하며 목이의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초나라 군대는 도강에 성공하고 전열을 다 갖춘 후에 전투가 벌어진다. 수적으로 열세인 송나라 군대는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그리고 송양공은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는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맺음말
우리는 여기에서 세 번째 춘추오패 송양공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사실 송나라의 군사력은 초나라의 군사력보다 열세이다. 그러나 송양공이 춘추오패로 인정받았던 것은 군사력보다 외교와 대의명분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례를 들면 초나라의 가을 회맹 때에 포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회맹의 맹주라는 명분을 위해 참석해서 포로가 된다. 이러한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송양공은 주위 제후들에게 맹주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목이는 군주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더라도 끝없이 바른말을 간언하고 충성을 다한다. 심지어 송양공이 초나라의 포로가 되었을 때 목이는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의리를 지켜 다시 송양공을 왕으로 모신다. 요즈음 현대인들은 그들을 '마음만 좋아 바보같이 손해만 보는 사람'이라고 비웃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기의 이익만 찾고 대의명분과 의리는 경시한다. 이러한 시대에 '송양공의 대의명분과 목이의 끝없는 충성'은 다시 한번 새로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이 글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 환공(소백)의 춘추오패 등극과 관포지교, 관중과 포숙아, 문강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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