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 진(晋) 나라 문공은 아버지 헌공으로부터 추방당하여 어머니의 나라(적족땅)로 도망간다. 5명의 가신과 같이 19년 동안 여러 나라로 도망 다니며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생사고비를 다 넘긴 후 의형제 진목공의 도움으로 62세에 고국 진나라로 돌아와 왕이 된다. 진문공은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서 믿음(信)을 중요시하기에 그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많은 신하들이 있었다. 그러한 신하들의 도움으로 그는 춘추오패(제환공, 진목공, 송양공, 진문공, 초장왕)가 된다. 여기에서는 춘추오패에 등극한 방랑자 진문공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출생과 왕위계승 싸움
진문공은 복잡한 가계로 왕위계승 다툼에 휘말리게 된다. 그의 가계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진 문공(晋文公 중이, ? ∼ BC 628)은 진나라 방계왕족이다. 직계왕족을 멸하고 왕이 된 진 무왕의 아들인 진헌공이 그의 아버지이다. 진헌공은 3개 출신인 부인들이 있었다. 1. 부인 제강에는 태자 신생과 나중에 진(秦) 목공의 부인이 되는 공주 목희(백희)가 있다. 2. 적족 고씨 자매에게는 언니의 아들인 중이(진문공)과 동생의 아들인 이오(진혜종)가 있으며 이오의 아들이 진 회공(태자 어)이다. 3. 읍족 자매 여희에게는 해제, 진헌공의 애첩 소희에게는 탁자가 있었다. 여희는 태자 신생을 폐하고 자기 아들 해제를 왕위로 올리려고 음모를 꾸민다.
· 여희의 음모
여희의 말을 듣고 진헌공은 상군은 자기가 맡고 하군은 신생에게 주어 성을 축조케 한다. 속마음을 눈치챈 신하 사위가 신생을 다른 나라로 도망치라고 회유를 한다. 그러나 신생은 거절하고 동산씨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우나 진헌공은 오히려 좋아하지 않다. 태자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여희는 진헌공의 질투심을 자극하기로 계략을 꾸민다. 여희는 몸에 꿀을 바르고 신생을 만난다. 벌이 여희에게 달려드는 것을 쫓아 주다가 서로 접촉하게 된다. 이 장면을 아버지 진헌공이 보게 된다. 진헌공은 화가 나 태자 신생을 폐하여 죽이려고 한다. 이때 여희는 거짓 눈물을 흘리며 이를 말린다. 또 여희는 신생에게 어머니 제강의 음식을 가져오게 하여 독을 넣는다. 진헌공이 음식을 먹기 전에 독검사를 시켜 진헌공이 알게 한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신생은 죽음을 피해 도망을 친다. 여희는 눈물로 이간질을 시킨다. 결국 진헌공은 환관 발제를 시켜 사약을 내려 신생을 자살하게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중이와 이오는 죽음을 피해 어머니의 고향인 적족 땅으로 도망을 치게 된다. 이때 중이는 이미 43세였다.
유랑 생활
중이는 5명의 가신(호언, 조쇠, 위주, 서시, 개자추)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 적족 땅으로 망명한다. 이를 후세사람들은 1룡 5사라고 한다. 그 일행은 위나라. 제나라. 조나라. 송나라. 정나라. 초나라. 진나라를 거쳐 19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위나라 오록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현지의 농민에게 음식을 구걸하였는데 흙을 받는 일도 있었다. 그런 수모를 이겨내며 그들은 계속 방랑생활하였다. 망명한 지 5년이 지났을 때 진나라에서는 진환공은 죽고 격렬한 후계 싸움이 벌어진다. 이극이 반란을 일으켜 해제와 탁제를 죽이고 임금으로서 맞아들이려고 중이에게 연락을 하나,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한 중이는 이를 거절한다. 이극은 진(秦) 목공과 함께 이오(진혜왕)를 왕에 옹립하게 된다. 진혜왕은 왕이 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진(秦) 목공이 쳐들어 와 혜공을 사로잡고 태자 어를 인질로 잡아간다(한원전투). 또 혜공은 자객 발제를 보내 중이를 죽이려고 하자 중이는 제나라로 도망친다.
제나라 환공은 그들을 환대하여 딸을 아내로 주고 마차 20승을 주었다. 중이는 제나라 아내를 얻어서, 제나라를 떠나려고 생각하지 않자, 호언, 조쇠 등은 중이에게 술을 먹여 만취한 그를 모시고 제나라를 떠난다. 중이는 술이 깨자 격노해 호언을 죽이려고 했다. 호언은 "저를 죽여 공자의 대업이 완성된다면 바라던 바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렇듯 그들은 오직 대업을 위해 때를 기다리며 온갖 고통을 참고 있었다. 제나라를 탈출하여 조나라, 송나라, 정나라를 거쳐 초나라에 도착하자 초성왕은 그들을 제후로 대접하며 환대한다.
· 개자추와 한식
망명 후 유랑생활을 할 때 중이의 재산관리인 두수가 모든 재산들 들고 도망가자 먹을 것이 전혀 없었다. 이때 가신인 개자추가 자기 넓적다리의 살을 떼어 요리하여 중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 후 문공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19년 동안 같이 유랑했던 자신을 등용하지 않자, 실망한 그는 면산에 들어가 숨어 산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문공은 그를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그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지른다. 그러나 끝내 나오지 않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어머니를 꼭 껴안고 타 죽어 시신이 된다. 한식(寒食)은 개자추가 타 죽은 것을 애도하기 위한 날로서, 이때 불을 사용하지 않은 찬밥을 먹는다고 한다.
귀국과 왕 재위
진 혜공이 죽자, 진(秦)나라 인질로 잡혀있던 태자 어가 도망가 진(晋) 회공이 되었다. 인질이 마음대로 도망가자, 진(秦) 목공은 크게 화내었고, 이에 중이를 진(晉) 나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초나라에 머무르던 중이를 부른다. 이에 중이는 진목공의 부름에 따라 진(秦) 나라 군대를 이끌고 고향 진(晉) 나라로 돌아온다. 진 혜공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중이를 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드디어 중이는 왕이 되어 후에 진 문공이 된다. 이때의 그의 나이 62세이다.
정치활동
앞서 진혜왕(이오), 이극과 진목공이 배신하는 정치를 펼쳐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것을 눈으로 보아왔기 때문에, 진문공은 그 폐단을 잘 알고 있었다. 진혜왕은 이극을 죽이고 진목공에게 약속한 하서지방의 땅을 주지 않았다. 또 백리해의 요청으로 진목공은 가뭄에 처한 진혜왕을 도왔다. 그런데 이듬해 진(秦) 나라에 가뭄이 닥치자, 진혜왕은 오히려 전쟁을 일으킨다. 이에 진목공은 한원전투에서 진혜왕을 사로잡는다. 태자 어를 볼모로 잡고 혜왕을 풀어준다. 이에 반해 진문공은 믿음의 정치를 펼친다.
· 믿음의 정치
진문공은 "믿음(信)이 정치의 근본이다"라는 마음으로 정치를 실천한다. 진문공의 믿음의 정치는 신하들에게 신뢰를 주게 된다. 따라서 많은 신하들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게 된다. 자기 몸을 희생하여 충성을 다하는 개자추 같은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원의 땅을 치는데 조쇠의 직언으로 '10일의 신뢰'를 지키자, 원이 항복하고 위가 투항하게 된다. 초나라 성왕이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 양공이 진문공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때 초나라와 벌어진 전투가 성복전투(BC 632)이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하게 되어 마침내 중원의 패자가 된다. 이 전투에서도 진문공은 19년 유랑생활 때 한 약속(초나라와 전쟁이 있으면 90리를 후퇴하겠다.)을 지킨다.
· 정치의 안정화
적절한 논공행상으로 정치를 안정화시키며 특히 자기를 암살하려던 '사인파'까지도 중용을 하였다. 진문공은 많은 부인이 있었으나 부인들 스스로 서열을 정하여 문제없이 태자를 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라는 크게 부강해진다.
맺음말
우리는 위에서 춘추오패에 등극한 방랑자 진문공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진문공은 왕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미움을 받고 추방당하여 19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춘주오패로 등극하는 것을 살펴 보았다. 약간의 실패에도 좌절하는 현대 사람에게는 방랑자 진문공의 이야기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 다음은 이 글과 관련이 있습니다. 춘추오패 서융의 패자 '진(秦) 목공'과 백리해, 건숙, 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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