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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사

고려·거란 전쟁 - 서희의 담판, 양규의 흥화진 전투, 강감찬의 귀주대첩

by 이야기마을촌장 2025. 3. 7.

고려와 거란(요나라) 사이의 전쟁은 993년부터 1019년까지 3 차례에 걸쳐 벌어졌다. 이 전쟁은 고려의 독립성과 국권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거란전쟁의 결과 고려는 독립성과 자주성을 확립하게 되어 문화적 황금기를 맞이한다. 반면에 거란은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로 내부가 불안정하게 되었으며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잃고 쇠퇴하게 된다. 

고려거란전쟁


국제 정세

· 국제 정세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거란(요나라)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아시아 북부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송나라를 견제하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송나라는 거란의 압박을 받으며 남쪽으로 밀려나 있어,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거란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또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북진 정책을 추진하며, 압록강 유역과 만주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가 송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거란에게 위협이 되었다. 한편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유입되면서, 고려와 거란 사이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고려·거란 전쟁 

· 제1차 고려·거란 전쟁 : 서희의 담판

993년(성종 12년) 10월, 요나라 동경유수 소손녕 8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 부근을 통해 고려를 침공한다(거란의 제1차 침입). 이에 성종은 친히 안북부(안주)까지 나아가 박양유와 서희 등을 보내 막는다. 고려는 초기 전투에 봉산군을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가 이몽진을 거란으로 보내 내침의 진의를 타진한다. 거란의 소손녕은 항복만 요구할 뿐 명분이 없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거란에 항복하자는 항복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고 황주와 절령을 국경으로 삼자는 할지론 등의 주장이 등장하더니 할지론으로 기울어진다. 그러자 서희, 이지백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니 성종은 이에 따르게 된다. 한편 고려가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하자 거란은 화친은 제안한다. 이에 고려 조정은 서희를 급파한다. 결국 "고려는 고구려의 옛땅이다"라는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거란군을 물러가게 한다. 거란과의 형식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인정하는 대신,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에 강동 6주(흥화진, 통주, 귀주, 곽주, 용주, 철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송나라와는 공식적 외교 관계는 단절하고 동북·서북 지방의 경계에 특히 유의하게 된다. 그러나 송과의 비공식적인 교류는 계속 유지한다. 따라서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외교적 승리로 평가된다.

 

· 제2차 고려·거란 전쟁 : 강조, 양규

1010년(현종 1) 요나라 성종은 요가 책봉한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옹립한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 이에 양규가 흥화진에서 항전하자 거란의 성종은 이를 피해 우회 공격한다. 이에 현종은 강조에게 30만 군대를 주어 통주에서 방어하게 하였으나, 강조는 패하고 죽임을 당한다. 거란은 곽주, 안주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킨다.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강감찬의 반대로 현종은 지채문의 호위를 받으며 나주로 비참한 몽진을 한다. 현종은 창화현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서는 괴한들이 현종에게 활을 쏘았다. 나중에 공주를 빠져나오면서 임신한 왕후마저 떼어놓고 피난해야만 했다. 이 시기 현종은 공주에서 머물다 김은부의 딸과 관계를 맺게 되고 나중에 그의 딸들이 왕후가 된다.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고 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고려가 하공진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거란의 성종은 현종이 친조하는 조건으로 철수한다. 양규와 김숙흥은 철수하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히고 전투 중에 전사한다. 나주로 피난 간 현종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온다. 

 

· 제3차 고려·거란 전쟁 : 강감찬 귀주대첩

고려에서는 이미 거란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국방을 강화하여 상당한 전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1018년(현종 9) 거란의 소배압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다. 이에 현종은 상원수 강감찬, 부원수 강민첨에게 20만 대군을 보내 방어 한다. 고려는 1만 2천 기병 매복시키고 냇물을 막았다가 일시에 내려보내 승리한 흥화진 전투에서 거란군을 대파한다. 그 후 거란군은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후방 지원부대가 부족하여도 오직 개경 함락을 목표로 진격한다. 그러나 식량이 될만한 것은 모두 불태워 없애버리는 청야전술에 말려 거란군은 식량공급에 차질을 빚는다. 결국 소배압은 개경 가까운 신은현에 도달하였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고 고립 포위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한다. 그러자 고려군은 협공으로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섬멸시키는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둔다. 거란군은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전멸하게 된다. 결국 이듬해 고려 현종이 거란에 화친을 요청하자, 거란은 고려와의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3세기 중엽 몽고의 침입이 있기까지 약 200년간(덕종, 정종) 평화의 시대가 오게 된다. 

 

 

결과와 의의

· 결과
고려는 서희의 외교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확보하여 압록강 하류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만든다. 또한 국방력을 강화하여 거란과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압록강과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 방어를 위해 조성도감을 설치하고 약 20년에 걸쳐 개경 외곽에 23Km에 달하는 거대한 나성을 쌓는다. 

· 의의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며 독립 국가로서의 자주성을 지켰으며, 초조대장경7대실록을 편찬하여 문화적 번영을 이루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의 세력 균형이 형성되어 안정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 결과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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