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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유사

혜숙 스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진표율사 밀본법사, 설서당, 법상종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5. 19.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승려 일연이 인각사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야사인 역사서로 전체 5권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여기에서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혜숙 스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그리고 신통한 스님의 설화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원효

 

재미있는 설화

· 혜숙 스님

신라 진평왕 때 혜숙 스님 본래 화랑이었는데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이 적선촌에 숨어 지낸 지가 20여 년이나 흘러갔다. 어느 날 국선 구담공이 적선촌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혜숙 스님이 말고삐를 잡고 “어리석은 빈도도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청한다. 이에 공이 이를 허락하니 스님은 옷을 벗어젖히고 이리 뛰고 저리 달린다. 공이 앉아서 쉬며 고기를 굽고 삶아서 먹기를 권하니 혜숙도 함께 먹으면서 조금도 꺼리는 빛이 없었다. 얼마 후 혜숙이 공의 앞에 나아가 “지금 싱싱하고 맛있는 고기가 있으니 좀 더 드시렵니까?”라고 말한다. 공이 좋다고 하니 혜숙이 사람을 물리치고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소반에 놓아 올리니 옷 위로 붉은 피가 솟아 흘렸다. 공이 깜짝 놀라 “왜 이런 짓을 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혜숙은 “내가 처음에 생각하기에 공은 어진 사람이라 자기 몸을 통해서 능히 만물에까지 통할 수 있는 분이라 여겨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오로지 죽이는 것만을 즐기어 남을 해치고 자기 몸만 기를 뿐이오니 어찌 이것이 군자의 행할 일이겠습니까?"라고 말하고 가버렸다. 공이 크게 부끄러워하여 혜숙이 먹던 쟁반을 보니 소반 위의 고기살이 그대로 있었다. 공이 몹시 이상히 여겨 돌아와서 진평왕에게 아뢰었더니 사자를 보내어 스님을 찾아오도록 했다. 사자가 혜숙을 찾으러 가니 스님이 여자와 함께 침소에 누워 자고 있었다. 사자는 더럽게 여기고 그대로 돌아가는데 도중에서 스님을 만났다. 사자가 스님께 이상하게 여기며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성안의 시주 집에서 7일제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사자가 돌아와 왕에게 아뢰니 임금은 시주집을 조사해 보니 사실이었다. 얼마 후 혜숙스님이 갑자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현 동쪽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현 서쪽에서 오고 있던 그 마을의 사람이 도중에서 혜숙대사를 만났다. 그는 스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므로 이제 다른 지방으로 유람 가는 중이요”라고 말하고 서로 헤어졌다. 그 사람이 반리쯤 오니 고개 동쪽에 장사 지내는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상히 여겨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 준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스님을 장사지낸 무덤을 파헤쳐 보니 한짝의 짚신만 있었다.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불교를 대중화해 반석에 올려놓은 대학자인 원효(617~686년) 대사와 '요석공주와의 로맨스'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백성들 삶 속에서 참 수행의 길을 찾으려는 원효는 저잣거리를 떠돌면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준다면 내 기필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베어올 것이다."라는 노래하고 다녔다. 이 노래를 들은 태종무열왕(재위 654~660년)은 자루 없는 도끼가 과부를, 하늘을 떠받칠 기둥은 현인을 의미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자신의 딸이자 과부인 요석공주와 맺어주려고 마음먹는다. 이미 원효의 학식과 인품을 깊이 흠모하고 있던 요석공주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종무열왕은 원효대사가 문천교를 지난다는 사실을 알고 원효대사를 궁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한다. 원효대사가 문천교 들어서자 군사 대장이 정중하게 “원효대사님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요석궁으로 가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원효대사는 들은 채도 하지 않는다. 다급해진 대장은 원효대사의 앞을 막고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내기무술 시합을 청한다. 그러나 대장은 출가 전 낭도로서 무예가 깊었던 원효대사에게는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일부러 발을 헛디딘 척하며 갑자기 물에 뛰어들어 옷을 적신다. 옷을 말리는 것을 핑계로 요석궁에 갔다가 사흘동안 그곳에 머무른다. 그 결과 요석 공주는 임신해 설총을 낳게 된다.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난 시기는 태종무열왕 재위 때이므로 그의 나이 37~43세에 해당한다. 이 사건 이후 원효대사는 스스로 승복을 벗고 파계승이 되었고, '무애'라는 박으로 만든 북을 지고 다니며 자신을 ‘소성거사’라 하였다. 그후 원효는 요석궁을 떠나 자신의 고향인 압량에 직접 세운 반룡사로 들어간다. 원효를 찾은 만삭의 요석공주는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절에서 멀지 않은 삼성산 자락의 경산시 유곡동 한 민가에서 설총을 해산한다. 원효가 소요산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할 때에도 요석공주는 아들 설총을 데리고 찾아간다. 요석공주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대신 산 아래에 별궁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원효가 수도하는 원효대를 향해서 아들과 함께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둘은 끝내 함께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향전>이라는 책을 인용하면서 원효와 요석공주의 로맨스를 소개하고 있으나 일연조차도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야기에 대하여 의심을 가진다. 원효에 관한 가장 정확한 자료로 꼽히는 원효의 손자 설중업이 9세기 초 원효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비석인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988년 중국 송나라 승려인 찬녕이 저술한 중국과 한국의 고승 전기인 <송고승전(宋高僧傳)>에도 요석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원효의 세속 이름은 설서당(薛誓幢)이었다. 또한 <삼국사기 '설총전'>에도 설총의 어머니가 공주였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신통한 스님 설화

· 진표율사

진표 율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 출신으로 세속의 성은 '정씨(井氏)'라고 한다. 그는 어머니는 '길보랑', 아버지는 '진내말'의 아들로 구워 먹으려고 둔 개구리를 보고 12세 때 출가하여 금산사로 들어가서 전국 유명 산을 다니다가 변산의 '부사의방장'이라는 절벽에 붙은 바위덩이에서 수행을 한다. 그런데 수행한 지 3년이 지나도 수기를 받지 못하자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진다. 이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그를 구해 준다. 그 후 팔다리를 돌로 찍어가면서 수행하는 방법인 망신참법으로 수행하여 손과 팔목이 부러지는 고통 끝에 득도한다. 속리산에 있던 영심 등이 교를 받으러 찾아오자 그들에게 불경과 미륵의 간자를 전하여 속리산으로 돌아가서 길상초가 난 곳에다 길상사(지금의 법주사)라는 절을 짓게 한다. 후에 금산사를 중창하고 신라 5교 9산 중 법상종의 시조가 된다. 진표율사를 한반도 미륵신앙의 시조로 보기도 한다. 

 

· 밀본법사
선덕왕 덕만이 질병에 걸려 오랫동안 낫지 않자 밀본법사를 부른다. 밀본이 침실 밖에서 <약사경(藥師經)> 다 읽고 나자 가지고 있던 육환장이 왕의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더니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을 찔러 뜰아래로 거꾸로  내던졌고, 순간 왕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이때 밀본의 이마 위에 오색의 신비스러운 빛이 비쳐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했다. 또한 김양도가 어렸을 때 귀신의 저주를 받아 갑자기 온몸이 마비되어 말도 못 하고 거동도 못하게 되었는데, 그의 눈에만 큰 귀신 하나가 작은 귀신들을 데리고 와서 집안을 돌아다니며 집안의 음식들을 모조리 맛보는 것이 보였다. 김양도가 보니 언제나 큰 귀신 하나가 귀신 여럿을 거느리고 와서 서로 다투었는데 귀신을 물리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법류사 스님을 청해 암송했는데 큰 귀신이 작은 귀신을 철퇴로 쳐 죽였다. 며칠 뒤 사람들이 밀본법사를 불러오게 했는데 밀본법사가 도착하기 전에 갑자기 사방에서 갑옷과 장창으로 무장한 대력신이 나타나 집안을 돌아다니던 모든 귀신들을 잡아 묶어갖고 돌아갔으며, 그다음에 무수한 천신들이 둘러서서 밀본이 경을 펴기도 전에 김양도의 병은 모두 나았다. 그 후 김양도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게 되었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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