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승려 일연이 인각사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야사인 역사서로 전체 5권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여기에서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백률사 부례량, 조신지몽, 포항 오어사, 원효와 의상 스님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재미있는 설화
· 백률사 부례랑 설화
692년에 국선이 된 부례랑(夫禮郎)은 693년 3월에 화랑의 무리를 거느리고 북명에 이르렀다가 말갈족에게 잡혀갔다. 문객들은 당황하여 되돌아갔으나 안상만이 그를 뒤쫓아 갔다. 효소왕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었으므로 내고를 조사시켰더니 현금(玄琴 거문고)과 신적(神笛)의 두 보물이 없어졌다. 왕은 보불을 찾기 위해 현삼금을 건다. 이후 5월에 부례랑의 부모는 백률사 관음상 앞에서 여러 날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향탁에 현금과 신적이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부모가 놀라 그 내력을 물으니, 부례랑이 적에게 잡혀가서 말을 먹이는 자가 되어 방목을 하고 있는데 용모가 단정한 승려가 손에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며 “나를 따라오라.”라고 하였다. 해변에 이르러 안상과 만나 신적을 둘로 쪼개어 부례랑과 안상이 하나씩 타게 하고 자기는 현금을 타고 하늘을 날아서 잠깐 사이에 백률사에 왔다는 것이었다. 부례랑이 현금과 신적을 왕에게 바치고 이 사실을 아뢰니, 왕은 백률사에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마납 가사를 바쳐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였다. 그 후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 사라지지 않자 왕이 현금(거문고)에 벼슬자리를 주고, 신적(피리)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벼슬에 봉하자 혜성은 사라진다.
· 조신지몽(調信之夢)
신라의 승려 조신(調信)은 본디 세달사(世達寺)에 있었는데, 절의 장원이 명주 내리군에 있어 파견되어 장원을 관리하였다. 조신은 명주 태수 김흔(金昕, 803~849)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낙산사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그 여인과 맺어지게 해 주십사 하고 남몰래 기도한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그녀는 다른 남자와 혼사가 정해졌다는 소문이 들린다. 조신은 밤중에 불당에서 관세음보살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사모하던 낭자가 스스로 불당 문을 열고 조신을 찾아왔다. 낭자 또한 조신에게 연정을 품고 집을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도피하여 부부의 연을 맺고 가정을 일구었다. 두 남녀는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식 5명을 낳았으나 찢어지게 가난하였다. 나중에는 집도 잃고 온 가족은 구걸로 먹고 살기를 10년 간이나 한다. 어느 날 명주 해현령 고갯길에서 15살 된 큰아이가 굶어 죽자, 부부는 시신을 길 옆에 묻었다. 그 뒤 남은 가족들이 우곡현에서 풀을 엮어 집으로 삼아 구걸로 먹고 산다. 어느 날 10살 된 딸이 구걸을 하다가 개에게 발목을 물려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 꼴을 보고 가슴이 찢어진 아내가 "다 함께 굶어 죽기보다는 서로 헤어져 상대방을 그리워함만 못할 것입니다. 인연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헤어지고 만남에도 명이 따르는 것이지요. 바라건대 이제 헤어집시다."라고 말한다. 조신은 아내의 말을 듣고 각자 아이들을 둘씩 데리고 헤어지기로 한다. 두 사람이 서로 잡았던 손을 막 놓고 길을 떠나려는데 조신은 꿈에서 깨어난다. 마치 한평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겪은 듯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새하얗게 세어버렸다. 자기 앞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웠다. 조신이 돌아가는 길에 꿈속에서 큰아이를 묻은 곳에 들러 땅을 파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조신은 미륵상을 물에 씻어 가까운 절에 봉안하고 세달사로 돌아와 소임을 내려놓는다. 그 후 조신은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하며 살았다. 후세에 춘원 이광수는 일장춘몽의 허무한 인생을 그린 조신지몽을 참고하여 중편소설 <꿈>을 쓰게 된다.
· 포항 오어사
경북 포항시 오천읍 항사리 운제산에는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572~632년) 때 지어진 오어사(吾魚寺)라는 절이 있다. 오어사 유물전시관에는 1,400년 전 원효대사가 쓰던 높이 1척, 지름 약 1.5척인 삿갓이 전시되어 있다. 오어사의 원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이다. '항사(恒沙)'란 '길게 이어지는 모래 벌'을 의미한다. 그 후 항사사는 '내 물고기'라는 뜻의 오어사로 개명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절에는 원효(元曉)와 혜공(惠空) 두 스님이 머무르고 있었다. 하루는 두 스님이 절 개울가에서 헤엄치며 놀다 물고기를 잡아먹고 난 후에 물속에 방변하였는데, 그 변이 두 물고기가 되어 상류와 하류로 헤엄을 쳐 간다. 그러자 원효와 혜공은 서로 상류 쪽으로 올라간 물고기를 '내가 잡은 고기' 즉 '오어(吾魚)'라 주장을 했다는데서 이 절 이름이 '오어사(吾魚寺)'라 고쳐졌다는 것이다.
· 원효와 의상 스님
원효와 의상은 화엄사상을 공부하러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중 포구인 당진 근처에서 비바람을 만난다. 그들은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 비바람을 피해 토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그때 원효는 토굴 안쪽에는 바가지 하나에 마시기 적당한 물이 있어 잠결에 깨어나 너무도 맛있게 갈증을 축인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곳은 토굴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무덤 속이었고, 그 무덤은 비바람에 파헤쳐지고 바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해골이었으며 달고 맛있게 마신 물은 다름 아닌 해골에 고인 빗물이었던 것이다. 원효는 지난밤에 아늑한 토굴, 바가지, 달고 맛있던 물이 깨어보니 무덤, 해골, 해골물임을 알게 된다. 원효는 지난밤에 마신 해골물을 토하고자 하며 큰 고뇌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스스로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떠나려던 유학계획을 접어버린다. 의상스님은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종남산에서 화엄종의 초조인 지엄화상으로부터 법을 전해받고 화엄종의 전법제자가 되어 돌아와 신라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로 떠나지 않은 원효는 화엄종을 스스로 터득하여 토종 화엄종의 큰스님이 된다. 의상은 전국의 명당을 찾아 부석사, 낙산사 등의 큰 절을 짓고, 당시 귀족과 왕실로부터 추앙을 받는 큰 스님으로 귀족불교를 포교하였지만, 원효는 신라에서 갖은 기행을 하면서 당시 스님들과 신라에 이단적인 행동으로 백성들을 위한 화쟁과 정토사상을 담은 서민불교를 포교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깨달은 화엄의 세계와 화엄경의 내용을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의 책으로 전하고 있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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