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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유사

연오랑 세오녀, 박제상과 치술령 망부석, 서출지, 지증왕, 신라의 삼대 보물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5. 17.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승려 일연이 인각사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야사인 역사서로 전체 5권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여기에서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재미있는 설화와 신라의 삼대 보물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서출지

 

재미있는 설화

· 연오랑 세오녀

제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 지 4년째인 정유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나아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연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이는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그를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고는 역시 그 바위에 올라갔는데, 바위가 또한 전과 같이 세오를 태워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의아하게 여겨 왕에게 나아가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이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왔었는데 지금은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았더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니, 이제 어찌 돌아가겠소? 그렇지만 짐의 비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오.”라고 하면서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뢰어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왕의 창고에 보관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라고 불렀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고 불려진다.

 

· 박제상과 치술령 망부석

어느 날 신라의 17대 임금인 내물왕 때 열 살인 셋째 아들 미사흔(미해)을 왜에 볼모로 보내고, 이후 내물왕의 첫째 아들이 왕위에 올라 눌지왕이 되자 임금의 아우인 복호(보해)를 볼모로 보내게 된다. 이에 눌지왕은 두 아우를 볼모로 보내고 나라에 힘이 없어 데려올 방법이 없다며 근심을 한다. 눌지왕은 박제상을 불러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 있는 두 아우를 데려와 달라고 말한다. 박제상은 곧바로 고구려로 가서 장수왕을 만나 인질에 된 지 오래되었으니 복호를 신라로 보내달라고 한다. 고구려 장수왕은 박제상의 말을 듣고 복호를 풀어주어 둘은 신라로 돌아온다. 그러자 눌지왕이 아직 왜에 잡혀있는 미사흔을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쉰다. 이에 박제상은 눌지왕에게 왜에 가 미사흔을 데려오겠으니 대신 자신이 신라를 배신하고 도망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달라고 한다. 박제상이 미사흔을 구하러 왜에 간다는 사실을 들은 그의 아내는 그를 붙잡지만 박제상은 배를 타고 왜로 떠난다. 그리고 왜의 임금을 만나 신라에서 역적죄를 짓고 쫓겨 왔다고 말한다. 왜왕은 박제상과 미사흔에게 길을 안내하도록 해 신라를 공격할 생각으로 박제상이 미사흔과 편히 살게 해 준다. 박제상은 어느 날 새벽에 일본에 살던 ‘강구려’라는 신라 사람의 도움을 받아 미사흔만을 신라로 돌려보낸다. 왜왕은 크게 노하며 박제상을 추궁하며 지금이라도 왜의 신하가 된다면 높은 벼슬을 주겠다고 하나,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다."라며 거절한다. 이에 목도(木島)로 유배를 보냈다가 박제상을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뾰족하게 베어놓은 갈대 풀밭 위를 걷게 하고 벌겋게 달군 쇠 위를 걷게 하는 등의 끔찍한 고문 끝에 화형에 처하게 되면서 419년 왜국에서 사망하게 된다. 한편, 눌지왕은 신라로 돌아온 미사흔을 만나 크게 기뻐한다. 그러나 박제상의 소식을 듣고는 애통해하며 박제상의 아내를 나라의 큰 어머니인 국대부인으로 책봉하고 박제상의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맞이하게 한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처음 남편이 일본으로 떠날 때 이를 듣고 좇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망덕사 문 남쪽 모래사장에 이르러 누워서는 크게 부르짖었다. 그 모래사장의 이름을 장사(長沙)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 부인이 다리가 풀려 앉은 채로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 땅의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 이르게 되었다. 그 후 오래 동안 부인은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 죽어 치술령의 신모가 된다. 지금도 부인을 기리는 사당이 존재한다. 치술령은 울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상에 있는 바위는 지아비를 그리워하던 바위라고 하여 망부석이라고 부른다. 그때 사당은 인근에 위치한 은을암(隱乙岩)으로 망부석과 은을암은 현재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 <박제상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서출지
​서출지(書出池)는 경주시 남산동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연못이다. 소지왕 10년 488년 정월 보름날 신라 소지왕(재위 479-500)이 천천정에 거동하였는데 쥐가 나타나 까마귀를 따라가라 한다. 왕이 병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여 이 못에 이르렀을 때 한 늙은이가 나타나 봉투를 준다. 봉투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신하가 봉투를 왕에게 바치니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하여 열어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관이 “두 사람은 보통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임금입니다”라고 아뢰며 봉투를 열어볼 것을 청하였다. 왕이 봉투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거문고 상자를 쏘라(射琴匣)”는 글이 쓰여 있었다. 이에 왕이 궁에 들어가 활로 거문고 갑을 쏘았는데 그 안에는 왕을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던 승려와 궁주가 숨어 있었다.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으므로 그 못을 서출지(글이 나온 연못)라고 불렀다. 그 후로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고 한다. 연못 서쪽에 있는 이요당(二樂堂)이라는 목조 누각은 1664년에 임적(1612-1672)이라는 학자가 1664년에 지었다.

 

· 지증왕
내물왕 증손으로 신라의 제22대 왕인 지철로왕(智哲老王) 또는 지대로왕의 시호는 지증왕으로 64세에 즉위하여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다.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특히 음경(陰莖)의 길이가 1척 5촌(35cm)이나 되어 훌륭한 배필을 구하기가 어려워 사신을 삼도에 보내 배필을 구한다. 하루는 지나가던 관리가 모량부 동로수나무 아래에서 개 두 마리가 북만한 크기의 똥덩어리를 놓고 서로 싸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수소문해서 똥의 주인을 찾았는데, 그 주인이 바로 키가 칠척 오촌(175~180cm)이나 되는 모량부 재상 박등흔의 딸이었던 연제부인 박씨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증왕은 연제부인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왕은 우경을 시행하고 순장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고, 농업을 권장하도록 하였다. 503년에는 국명을 신라로 확정한다.


신라의 삼대 보물

· 황룡사 장육존상

황룡사 장륙존상은 진흥왕 35년 AD 574년 3월에 조성된 높이 1장 6척(약 5m)의 석가여래좌상과 두 협시보살입상이 포함되어 있는 거대 불상이다. 이 불상은 인도의 아쇼카 왕(아육왕)이 불상을 조성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인연이 있는 땅에 가서 만들어지기를 기원하며 배에 금과 철 그리고 설계도를 띄워 보낸다. 마침내 배가 인연 있는 나라인 신라 땅에 이르러 장육존상이 완성됨으로써 아쇼카 왕의 염원이 이루어진다. 

 

· 진평왕의 천사옥대

진평왕의 천사옥대는 579년(진평왕 1)에 하늘이 내려준 것으로 금과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이다. 진평왕은 이 옥대를 나라의 중요한 행사 때 반드시 착용함으로써 왕의 신성성과 권위를 돋보이고자 하였다. 그가 자기 스스로를 하늘이 옥대를 내려줄 정도로 신성한 임금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던 이유는 전왕인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국인에 의해 폐위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진평왕은 재위 초기의 정치적인 개혁의 방편으로 이 옥대를 내세워 왕권을 크게 강화함으로써 53년이라는 장기간의 집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 황룡사구층탑

황룡사구층탑은 선덕여왕 14년 645년에 공사를 착수하여 이듬해에 완성된 신라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다. 당시 신라는 백제의 침략을 받아 대야성을 비롯한 서쪽의 40여 성이 함락되는 등 위기의 시기였다. 군사, 외교 등에 노력을 기울여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의 권유로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게 된다. 자장은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을 호법룡(護法龍)이 지켜주고 있는 황룡사에 세움으로써 모든 국민들을 불교신앙으로 통합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높이 67.6m의 거대한 탑을 세워 국력과 왕권을 상징적으로 과시함으로써 여자이기 때문에 위엄이 없다는 국내외적 여론을 무마하고, 왕권의 강화와 국력의 신장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신라 삼대 보물은 신라의 왕권 강화와 불교의 정법왕국사상이 표방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신라 불국토설과 연결된 호국사상이 강조되고 있다. 삼국유사를 집필한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당시까지 수많은 절과 탑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황룡사는 몽골침입으로 1238년(고종 25년) 소실된 후 터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진평왕의 천사옥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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