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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유사

만파식적 천존고, 세 곳에 나타난 관음상과 중생사, 화룡점정 장승요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5. 18.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승려 일연이 인각사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야사인 역사서로 전체 5권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여기에서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만파식적, 세 곳에 나타난 관음상과 중생사, 화룡점정 장승요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만파식적

 

만파식적

· 감은사와 대왕암
신라 31대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이고 성은 김 씨다. 681년 7월 7일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바다에 감은사를 세웠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서 이 절을 짓기 시작했지만 결국 완공하지는 못하고 세상을 떠나 바다의 용이 되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은 지의 법사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나라를 평안하게 지키겠다고 했다. 감은사는 결국 그 아들이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해인 개요 2년에 공사를 마쳤는데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용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였다. 왕의 유언에 따라 뼈를 보관한 곳은 대왕암이라 하였고 절은 감은사이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장소를 이견대라고 불렀다.

대왕암


· 만파식적 설화
임오년 5월 초하루에 해관인 파진찬 박숙청은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와서 물결에 따라왔다 갔다 합니다'라고 신문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기어 일관인 김춘질에게 점을 치게 하였더니, 그는 "거룩하신 선왕께서 이제 바다의 용이되어 삼한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 김유신 공도 삼십삼천(도리천)의 한분으로 이제 이 신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얘기를 들은 왕은 기뻐하며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행차해 산을 바라보고는 사람을 보내 살펴보도록 했다. 산의 모습은 마치 거북이 머리 같았고 그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해졌다. 일설에는 산도 역시 대나무처럼 낮에는 갈라지고 밤에는 합해진다고도 한다. 사자가 돌아와 왕에게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이 감은사에 묵는데 다음날 오시, 대나무가 합해져서 하나가 되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쳐 7일 동안이나 깜깜하였다가 그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잦아지고 물결이 잔잔해진 것이다. 왕이 배를 타고 산에 들어갔는데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띠를 받들고 와서 바쳤고 왕이 용을 맞이하여 함께 앉아서 물었다. "이 산의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해지는 것은 어찌해서인가?" 그러자 용이 대답했다. "비유하자면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합해진 연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거룩하신 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파리를 만들어서 불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마음을 합치셔서 이처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나로 하여금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왕이 놀랍고 기쁘기도 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으로 용에게 보답하고 명을 내려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은지 17일에 기림사(지림사)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태자 이공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축하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옥대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이 옥띠의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태자가 아뢰었다.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왼쪽 두 번째 것을 따서 계곡물에 넣었더니 곧 용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갔고 그 땅은 연못이 되었어요. 그래서 이 연못을 용연이라고 불렀다. 신문왕은 궁으로 돌아와서 용이 일러 준 대로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하였다. 과연 그 피리는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만파식적의 의의는 죽은 문무왕이 용으로 다시 변해 그다음 왕인 신문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만파식적을 주는 것으로 전제 왕권을 강화왕실의 번영과 평화를 상징한다. 또한 나눠졌다가 합쳐지는 대나무는 신라가 통합시켰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의 민심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호국사상의 염원이 담겨 있다.

 

 

세 곳에 나타난 관음상과 중생사

관음보살이 중국에서 황제와 화공의 꿈에 나타났다가 신라 중생사에서 나타나고 그리고 김해에 나타난다. 이렇게 세 가지 장소에서 나타났다 하여 '삼소'라 하며 중생사에 관음보살상이 모셔졌다 하여 이를 '삼소관음 중생사'라 한다. 그리고 다른 기적들은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직접 나타난 것인데 반해 여기서는 관음보살상 스스로가 기적을 일으켰다는 점이 다르다. 안따깝지만 중생사 십일면관음보살상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1. 중국 천자의 여자와 관음보살 

중국 천자는 화공에게 사랑하는 절세의 미녀를 그릴 것을 명했다. 그런데 화공은 그림을 그리다 실수로 붓을 떨어뜨려 그림 속 미녀의 배꼽 아래에 점이 찍혀 버렸다. 화공은 수정할 수도 없어서 그냥 그 그림을 천자에게 바쳤는데, 실지로 미녀에게는 그런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지 않으면 결코 그릴 수 없는 부분을  그린 것을 보고 천자는 분노하여 벌주려고 가둔다. 그래서 화공에게 어젯밤 천자의 꿈속에 나타났던 사람을 그림으로 그려내면 용서해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화공은 십일면관음보살의 상을 그려 천자에게 바친다. 천자는 자기 꿈에 십일면관음보살상을 보았던 것이다. 풀려난 화공은 박사 분절의 말을 듣고 중국을 떠나 불교를 숭상한다는 신라로 갈 것을 결심하여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신라에 와서 천자의 꿈에 나타났고 자신에게도 현몽하였던 관음보살을 상으로 조성하여 모셨는 곳이 바로 중생사이다. ‘삼국유사’는 전해지는 말에 이 중국화가가 바로 남북조시대의 유명한 장승요(張僧繇)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장승요는 이미 중국에서 다소 신통력을 지닌 화가로 “화룡점정”이란 말도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당나라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는 장승요가 벽에 용을 그려놓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는데 마침내 눈동자를 그리니 용이 날아가 버렸다든가, 천왕사라는 절에 공자의 그림을 그려두었는데 나중에 불이 났을 때 그곳만 타지 않았다는 등 다소 신비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흔히 남북조시대의 3대 화가고개지, 육탐미, 장승요를 꼽는데, 이 중에서 장승요는 풍만한 인물묘법이나 음영법 등을 구사하여 ‘육(肉)’을 이루었으며, 양 무제의 불사 때 자주 참여하여 이후 불교미술의 모범이 된다.

 

2. 최은함의 아이 최승로
신라 말년 나이가 많도록 아들이 없어 걱정하던 최은함이란 사람이 이 관음보살상 앞에서 기도한 뒤에 아들을 얻는다. 그런데 927년 후백제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와서 혼란에 휩싸였을 때 최은함은 관음보살 상의 발밑에 세 달 된 아이를 놓고 “이 아이는 관음보살님께서 주신 것이니 부디 지켜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떠나간다. 그리고 난리가 끝나고 반달 뒤에 돌아와 보니 아이는 막 목욕한 것 같고, 입에서는 젖냄새가 감돌았다. 이때 관음보살께서 돌봐주던 최은함의 아들은 자라서 고려초기 정치가로 유명했던 최승로였다. 

 

3. 성태 스님과 관음보살
고려시대인 992년 당시 중생사는 성태(性泰)라는 스님이 주지스님으로 보시가 들어오지 않아 절의 운영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성태 스님은 이 관음보살상 앞에 나와 사정을 말씀드리고 중생사를 떠날 생각이라는 말씀을 올렸다. 그러자 꿈에 이 관음보살께서 나타나서 “법사는 떠나지 마시오. 내가 시주를 해서 절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충분히 마련해 줄 것이오”라고 말한다. 그 후 어떤 두 사람이 소와 말에 물건을 잔뜩 싣고 와서는 시주를 하러 왔다. 그들은 금주(지금의 김해)에서 왔으며 중생사 스님 한 분의 청으로 이곳까지 쌀 여섯 섬과 소금 넉 섬을 싣고 보시하러 왔다는 것이다. 성태 스님은 중생사에는 자기밖에 없으므로 김해까지 갈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마도 잘 못 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스님이 우리를 데려오다가 중생사 근처 신견정(神見井)에서 이리로 가라고 일러 주었으니 틀림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법당에 봉안된 관음보살을 보고는 시주를 구하러 온 스님이 바로 저 관음보살이라며 깜짝 놀란다. 결국 중생사 관음보살님이 김해에까지 모습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그 후로 중생사에는 쌀과 소금이 끊어지지 않았다.

· 점숭 스님과 관음보살
1173년 이 절(중생사)의 주지인 점숭(占崇)이란 스님은 불력이 깊었지만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런데 이 절이 탐났던 한 승려가 친의천사(불교에 나오는 옷을 시주하는 천사)를 찾아가 점숭이 글을 읽지 못하니 주지 자격이 없다고 모함을 했다. 진상을 조사하러 나온 친의천사가 시험 삼아 점숭에게 의례문을 거꾸로 주며 읽어보라고 하니 점숭이 술술 읽어 내려갔다. 친의천사는 점숭이 스스로 읽을 줄을 몰라도 이 절 관음보살께서 보살펴 필요할 때 읽게 하시는구나 싶어 점숭이 계속 주지로 지내도록 하였다. 

 

 

※ 지면관계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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