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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삼국유사

아사달 아사녀와 무영탑, 김현과 호녀, 혜통 스님, 명랑 법사, 손순매아설화

by 이야기마을촌장 2024. 5. 20.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승려 일연이 인각사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야사인 역사서로 전체 5권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여기에서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아사달 아사녀와 무영탑, 김현과 호녀, 혜통 스님, 명랑 법사, 손순매아설화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아사달아사녀

 

재미있는 설화 

· 아사달과 아사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신라 재상 김대성은 백제 사비성에 살고 있는 유명한 석공 아사달에게 불국사의 석탑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아사달에게는 부인 아사녀가 있었다. 아사달이 떠난 지 삼 년이 넘어가자 아사녀는 아사달의 연적이었던 팽개의 치근거림을 피해 신라의 불국사로 찾아간다. 그러나 탑이 완성될 때까지 절에 여자가 들어갈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아사달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사녀가 절을 서성이니 보다 못한 스님이 석가탑이 완성되면 영지(影池)에 비칠 것이라는 말만 믿고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아사녀는 상심이 너무 큰 나머지 결국 연못에 몸을 던져 못에 빠져 죽는다. 석탑은 완성되자 스님이 아사녀가 영지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준다. 아사달은 영지로 뛰어가서 찾았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아사녀를 볼 수 없었다. 아사달은 아사녀의 모습과 비슷한 앞산의 바윗돌에 아사녀의 모습을 새겨 불상을 만든다. 이후 아사달도 아사녀를 따라서 연못에 몸을 던진다. 일설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이 연못을 ‘영지’라 불렀고 현재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는 영지(影池)가 있다. 그 옆 소나무 숲에는 아사달이 만든 불상인 영지 석불좌상이 있다. 그리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았던 석탑을 ‘무영탑’이라 불렀다. 불국사 삼층석탑(무영탑)은 높이 8.2m로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세워져 있으며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이라고도 한다. 1966년 해체·복원공사를 하던 중 제2층 탑신 중앙부 사리공에서 금강사리함(金剛舍利函)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광정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나왔다.

 

· 김현과 호녀

신라 풍속에 음력 2월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청춘 남녀가 흥륜사의 탑을 돌면서 복을 비는 습관이 있었다. 원성왕 때에 김현(金現)이 밤이 깊도록 홀로 탑을 돌다가 한 처녀를 만나 사랑을 맺게 되었다. 그런 후 김현이 숲 속으로 돌아가는 처녀의 뒤를 따라가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 호녀(虎女)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호녀에게는 사나운 세 오라비가 있었는데 하늘에서는 마침 한 마리를 죽이려던 참이었다. 오라비를 대신하여 죽기로 결심한 호녀는 김현에게 “저와 낭군은 부부의 의를 맺은 것입니다. 이제 세 오빠의 악으로 인한 재앙을 혼자 감당하려 합니다. 내일 저자에 나타나 많은 사람을 해칠 것이니 낭군은 겁내지 말고 나를 쫓아 성 북쪽의 숲 속까지 오시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잡은 공으로 높은 벼슬을 하라”라고 당부한다. 김현이 사랑하는 이를 죽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하늘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고 낭군 손에 죽기를 애원하였다. 이튿날 과연 범이 많은 사람을 해쳐 나라에서 큰 상을 걸고 범을 잡도록 하였다. 김현이 어제 그 숲에 가자 호녀가 나타나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모두 흥륜사의 장을 그 상처에 바르고 그 절의 나발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호녀는 김현이 찼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기꺼이 죽으니 곧 범의 시체로 변하였다. 낭자가 시키는 대로 다친 사람들의 상처를 모두 치료한 김현은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된다. 그 후 김현은 호녀를 위하여 호원사(虎願寺)라는 절을 세우고 명복을 빌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김현감호설화'라고 한다. 

· 손순매아설화

손순(孫順)은 모량리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학산이라 했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다가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는 이름을 운오라 했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어, 언제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손순은 이를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렵소. 이제 아이가 저렇게 어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차라리 이 아이를 땅에 묻어버려서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리는 것이 좋겠소."라고 의논했다.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 들로 가서 땅을 파니, 거기에서 갑자기 기이한 석종이 나왔다. 그들 내외는 놀라고 이상히 여겨 잠시 나무 위에 걸고 그 종을 쳐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고 고왔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이의 복인것 같으니 도로 데리고 갑시다."라고 하니, 남편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종을 들보에 달고 두드리니 그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그 종소리를 듣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더없이 맑고 멀리 들리니 속히 조사해 보라."라고 했다. 왕의 사자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옛날 곽거(중국에서 손순과 같이 하다가 금솥을 얻는 사람)가 아들을 파 묻을 때 하늘이 금솥을 내렸다더니,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났으니 이 두 효도는 천지에 똑같은 본보기로다."라고 하며 집 한 채와 해마다 곡식 50 석을 주어 그 지극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전에 살던 집을 내놓아 절을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안치했다. 진성왕 때에 후백제의 사나운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는데, 그 종을 얻은 곳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하나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신통한 스님 설화

· 혜통스님

어느 날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는 뼈를 동산에 버렸는데  뼈가 없어졌다. 그래서 핏자국을 따라갔더니 굴 속에서 다섯 마리의 새끼를 안고 웅크리고 있었다. 혜통이 그 모습을 보고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였다. 혜통이 당나라로 가서 선무외 삼장에게 배움을 간청하여 3년을 열심히 섬겼으나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루는 혜통이 분해서 뜰에 서서 화로를 이자 이마가 터지고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삼장이 이 소리를 듣고 손가락으로 터진 자리를 만지니 상처가 나았다. 흉터가 임금왕자 모양으로 생겨 왕화상이라 부르고 인결을 가르쳐주고 제자로 받아들인다. 당나라 황실의 공주가 병이 나자 당고종은 삼장에게 구해주기를 청했으나 혜통을 천거한다. 혜통은 흰콩 1말은 은그릇, 검은콩 1말을 금그릇에 넣고 주문을 외워 교룡(蛟龍)을 퇴치하여 공주의 병을 고친다. 혜통은 쫓겨난 교룡이 신라의 문잉림에서 사람을 해친다는 소식을 정공으로부터 듣고 신라로 돌아간다. 혜통이 교룡을 다시 쫓아내자, 교룡은 혜통을 신라로 불러들인 정공에게 앙심을 품고 정공의 집 앞 버드나무로 변신해 살았다. 효소왕이 신문왕의 능을 만드는 길목에 있는 버드나무를 베려고 한다. 그러자 버드나무를 좋아하던 정공이 "버드나무를 베느니 차라리 내 목을 베라"고 말한다. 이에 효소왕은 노하여 '제 원하는 대로 해주라'며 정공을 죽이고 그가 살던 집터마저 파묻어버렸다. 정공을 죽게 만든 뒤 교룡은 기장산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 효소왕은 정공과 친분이 있는 혜통을 제거하려고 군사를 보낸다. 혜통은 이를 알고 병목에 붉은 줄을 긋고 "내가 이 병의 목을 부러뜨리면 너희 목도 잘려나갈 것이다."라고 외친다. 병사들은 어쩌지 못하고 돌아간다. 병사들의 목에 그어진 붉은 줄을 본 효소왕도 끝내 혜통을 어쩌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 이후 효소왕의 공주가 갑자기 병이 들었고 효소왕은 혜통에게 병을 고칠 것을 명했다. 공주가 완치되고 난 다음에 혜통은 정공이 교룡의 농간으로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한다. 그러자 왕은 정공의 처자를 풀어주고 혜통은 국사로 삼았다. 한편 기장산으로 달아난 교룡이 백성들에게 패악을 부리고 있음을 알게 된 혜통은 기장산으로 가서 교룡을 타일러 불살계를 주어 교룡은 이후부터 악행을 부리지 않게 되었다. 

· 명랑 법사
법사는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로 들어가 불도를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 용의 청으로 용궁으로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시주받는다. 몰래 땅속으로 들어가 자기 집 우물 밑으로 솟아 나왔다. 이어서 명랑스님은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며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지었다. 668년에 당나라 장수 이적이 병사를 이끌고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백제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하고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자 당 고종은 설방에게 명하여 신라를 토벌케 했다. 이에 문무왕은 법사에게 요청해 불법으로 물리쳐줄 것을 요청했다. 명랑스님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라는 곳에 사천왕사를 창건하고 교리를 연구할 도량을 열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때 경기도 개풍에 당나라군이 들이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왕은 다시 물었다. “한시가 급하니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러자 명랑법사는 채색비단을 가지고 임시로 절을 짓고, 다섯 방위를 맡은 신장을 풀로 엮어 모시고 12명의 밀교승과 ‘문두루’라는 비법을 행한다. 그러자 갑자기 당군이 머물던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당군의 전선이 뒤집혀 침몰하고 말았다. 이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 불렀다. 671년에도 당군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으나 똑같은 술법으로 배들을 침몰시켰다. 동해 용왕 신인(神印) 받아 국가 위기를 기도로 극복한 명랑법사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맺음말

우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일연의 <삼국유사>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삼국유사>는 신라와 불교를 중심으로 쓴 역사서로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첫째, 단군신화가 수록된 최초의 역사서이다. 둘째, 신라인의 노래인 향가 14수가 실려 있다. 셋째, 가야국의 역사인 가락국기가 실려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한반도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문화, 생활 방식, 사고 등을 알 수 있게 만든 중요한 역사서, 불교서, 설화집인 동시에 문학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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