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34대 국왕 공양왕(恭讓王, 1345 ~ 1394)은 정원부원군 균(鈞)과 국대비 왕씨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정찬군 요(瑤)이다. 1389년 11월에 즉위하여 1392년 7월까지 2년 8개월간 재위한다. 공양왕은 고려 왕조의 쇠퇴를 막으려고 과전법을 실시, 급전도감 설치, 한양 천도 시도, 사원재산 몰수 등 개혁을 시도한다. 공양왕과 정몽주는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하자 정도전, 조준 등 급진 개혁파를 탄핵하여 귀양을 보낸다. 그러나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로 다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등 급직 개혁파들은 1392년 7월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한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475년 만에 34대 공양왕을 마지막 왕으로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게 된다.
출생과 즉위
· 출생
공양왕(恭讓王, 1345 ~ 1394)은 정원부원군 균(鈞)과 국대비 왕씨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정찬부원군 요(瑤)이다. 왕요는 왕이 되기 전 부유한 왕족으로 잘 지내고 있었으며, 이성계 일파들의 야심을 파악하고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보이기 위해 바보짓을 하기도 한다.
· 즉위
1395년 11월, 친명파 신진 사대부 이성계와 정몽주 등은 '가짜 왕을 몰아내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과 '우왕과 창왕은 역적 신돈의 자식이다'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우왕과 창왕을 폐위한다. 그러나 정창군 요는 부계와 모계 모두 고려의 왕실이고, 신종의 7대손이며 충렬왕의 외증손(외가 쪽으로 충렬왕의 4대손)이다. 또한 그의 형인 정양군 왕우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이방번과 결혼하여 이성계와는 사돈 집안 관계이다. 이런 이유로 이성계 일파의 추대를 받아 정창군 요가 왕이 되니 그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왕인 제34대 공양왕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44세이다. 1389년 11월에 즉위하여 1392년 7월 폐위될 때까지 2년 8개월간 재위한다.
고려의 멸망
애초에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던 공양왕은 이성계 등의 신진 사대부 급진 개혁파에 의해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여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키려고 한다. 공양왕은 관제 개편, 유학 진흥, 사원 재산 몰수, 한양 천도 시도, 과전법 실시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실시한다. 그러나 자신을 추대한 세력이 추진하는 개혁에 저항하고 수구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등의 행보를 보임으로써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한다.
· 과전법 시행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1389년 창왕 때 과전법을 제정에 반대하는 조민수를 탄핵하고, 우왕의 장인인 이림과 창왕의 외척인 변안렬 등을 제거하고, 공양왕의 즉위와 함께 복귀한 이색마저 탄핵한다. 그 후 과전법을 실시하여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제한하고 새로운 국가 체제를 준비한다. 이는 조선 건국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개혁이었다.
· 이성계의 낙마
공양왕은 측근인 재상 우현보와 홍영통 등도 윤이·이초의 옥사(무신 윤이와 이초가 명태조 주원장에게 이성계와 공양왕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그 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에 이성계는 그들의 사병들을 흡수하여 더욱 강해진다. 그러자 공양왕은 이성계를 회유하기 위해 화령부왕에 책봉하며, 회군공로자 57명에게 공신에 책봉한다. 한편으로 공양왕은 온건 개혁파의 중심인물인 정몽주와 함께 반격을 준비한다. 급진파인 윤소종, 정도전 등을 축출하고 온건파인 이색, 이승인 등을 다시 임명한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위독하다는 것을 기회로 4월 조준, 정도전, 윤소종, 남재 등 급진파를 삭탈관직하고 멀리 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공양왕과 정몽주의 반격이 거의 성공하는 것 같았다.
· 정몽주 암살
그러나 1392년 4월 4일 고려 왕조를 유지하려던 온건 개혁파의 정몽주가 말을 타고 이성계의 집으로 병문안을 간다.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명령으로 선죽교에서 조영규 등에 의해 암살된다. 이때 이방원이 시조 <하여가> 물음에 정몽주가 <단심가>로 답한 이야기가 유명하나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 지는 논란이 있다. 정몽주 암살된 후 공양왕은 완전히 무너진다. 심지어 왕이 어좌에 있는데도 신하들이 일어나 나가버리거나, 연회에 왕 면전에서 술주정을 하는 대신도 있었다.
· 조선 건국
급기야 공양왕은 신하인 이성계에게 군신동맹을 제안할 정도로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된다. 그것은 공양왕이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하는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1392년 7월 16일, 왕대비 안씨(정비 안씨)로부터 옥새를 건네받은 신료들이 이성계의 집으로 몰려가 즉위를 요청하니 이성계가 수락한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475년 만에 34대 공양왕을 마지막으로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게 된다.
사망과 가족
· 사망
1392년 7월 이성계, 정도전 등은 공양왕을 폐하고 강원도 원주로 유배를 보낸다.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간성으로 옮겨졌다가, 1394년 3월에 삼척 궁촌리 고돌산 살해재에서 왕세자 왕석과 함께 시해된다. 이때 공양왕의 나이는 49세이다. 그의 능은 고릉(高陵)으로 왕비 순비 노씨와 함께 합장된다. 현재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두 곳에 능이 있는데 삼척의 능은 처음에 묻힌 곳이고 고양의 능은 이장한 곳으로 추정되나, 어느 곳에 묻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 가족
공양왕의 부인은 제효공 노진의 딸 순비 노씨로 슬하에 2남(정성군 왕석, 미상) 3녀(숙녕궁주, 정신궁주, 경화궁주)를 둔다. 공양왕의 직계 후손은 단절되었으나, 공양왕의 4명의 숙부 중 둘째 아들인 학성부원군 왕향의 후손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요 인물
·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
정몽주는 정운관의 아들로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포은(圃隱)으로 고려 말기의 문신, 학자, 외교관이다. 1360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성균관 대사성, 문하찬성사 등을 역임한다. 외교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 삭감을 요구하여 성사시켰으며, 왜와의 외교에서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송환시키기도 한다. 고려 왕조를 유지하려는 온건 개혁파로서 권문세족의 부패를 비판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다. 역성혁명을 추진하던 급진 개혁파와 갈등을 빚어 공양왕과 함께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려다 실패한다. 1392년 4월 4일 이방원에 의해 개경 선죽교에서 암살당하며, 그의 죽음은 고려 왕조의 몰락과 조선 건국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의 충절은 시조 <단심가>에 잘 나타나 있다. 고려의 충신으로 사망한 정몽주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는 유교적 덕목을 실천에 옮긴 충절의 인물로 조선의 선비들의 본보기가 된다. 조선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고 13개 서원에 제향 된다. 그의 문집으로 <포은집>이 있다.
·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며 새 왕조에 출사 하지 않은 72명의 충신들을 말한다. 이들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의 두문동에 은거하며 나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사자성어가 유래가 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몽주, 조의생, 임선미, 맹희도 등이 있으며, 이들은 조선 태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후대에는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개성에 표절사(表節祠)가 세워졌고, 이들의 정신은 한국사에서 충절과 절개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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