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32대 국왕 우왕(禑王, 1365 ~ 1389)은 공민왕과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소생으로 아명은 모니노였다가 후에 강녕부원대군 우(禑)로 개명한다. 1374년 9월에 즉위하여 1388년 6월까지 약 14년간 재위한다.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이인임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다. 1388년 명이 철령위 설치를 통보해 오자, 최영을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이듬해 처형된다. 우왕 재위기간 중에는 신진사대부(정몽주, 정도전, 조준)가 성장하여 권문세족에 대립하고, 왜구의 피해가 극심하여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을 사용한 무기 제조 등으로 대비한다. 또한 청주 흥덕사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된다.
출생과 즉위
· 출생
우왕(禑王, 1365 ~ 1389)은 공민왕과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소생으로 아명은 모니노로 후에 강녕부원대군 우(禑)로 개명한다. 반야는 신돈의 시비로 공민왕과 동침하여 임신하여 신돈의 친구 능우의 어머니 집에서 아들을 출산한다. 신돈은 그 아들을 키우면서 이름을 '석가모니의 종'이라는 뜻의 모니노(牟尼奴)라고 짓는다. 1371년 신돈을 제거한 공민왕은 7세의 모니노를 궁궐로 데려와 이름을 왕우로 개명하고, 이미 사망한 궁인 한씨를 왕우의 생모라고 발표한다.
· 즉위
1374년 9월 공민왕이 측근인 홍륜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되자, 이인임의 추대로 10세의 왕우가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그가 바로 고려 제32대 국왕 우왕이며, 이인임과 명덕태후가 섭정을 한다. 우왕이 즉위하자 반야가 명덕태후의 처소에 나타나 자신이 생모라고 주장하다 쫓겨난다. 이에 이인임은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고 오해를 살까 염려하여 반야를 임진강에 수장시켜 버린다. 그러나 우왕은 신돈과 신돈의 여종 반야의 소생이라는 소문에 시달리게 된다. 후에 이성계 일파들은 이 소문을 '폐가입진'으로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한다.
우왕의 외교정책
· 대명과 대원 외교
1374년 11월 고려에 왔던 명 사신이 귀국 도중 호송관 김의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의는 원으로 도망가고, 공민왕 사망과 우왕 즉위의 소식을 명나라에 전하러 가던 고려의 사신은 귀국한다. 그러자 명나라에서는 책임을 물어 우왕의 책봉을 거부한다. 공민왕의 피살 소식에 북원은 심양왕 왕고의 손자 톡토부카를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다. 이에 이인임은 명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정국 안정을 위하여 원나라에도 사신을 보내어 정식으로 소식을 알리고, 이어 파견된 원의 사신을 맞이한다. 그러나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은 원과의 관계 재개에 반대하였으며, 그 결과 1375년 대규모로 유배되어 정계에서 숙청된다. 이후 1377년 북원은 우왕을 책봉하는 사신을 파견하고 고려는 원의 연호를 사용한다. 이후 1381년 명태조가 운남의 양왕을 정벌하고 1382년 1월 양왕과 그의 가솔들을 제주도에 살게 하고, 복속과 전쟁 중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이에 고려에서는 우왕과 최영이 명과의 결전을 위한 준비하는 등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고려는 더욱 명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니, 드디어 1385년(우왕 11) 명은 공민왕의 시호를 내리고 우왕을 책봉한다. 1387년 명 태조는 요동지역의 나하추를 정벌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이와같이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우왕과 최영은 줄타기 외교를 하며 은밀히 군사력을 증강하고 앞으로 벌어질 지 모르는 명과의 일전에 대비한다.
왜구의 침입
왜구의 침입은 1350년 충정왕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가 공민왕을 거쳐 우왕 때 극에 달하여 그의 재위기간 14년 동안 378회의 침입을 받는다. 이에 조정에서는 김의, 임견미, 이성계, 최영 등을 보내 왜구를 토벌케 한다. 1377년 우왕은 수도 개경이 해안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침략할 수 있다는 이유로 철원으로 천도하려다 최영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된다. 왜구를 토벌하는 가운데 공을 세운 최영,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무인세력들이 그 세력을 키우게 된다.
· 홍산대첩
1376년(우왕 2년), 충청도 부여와 공주 지역에 왜구가 침략하자, 홍산(부여)에서 61세의 노장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이를 격퇴한다. 이 전투는 왜구의 침략에 대한 초기 대응으로 고려군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리게 된다.
· 진포해전
매년 침략하는 왜구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1377년 조정은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화약 무기를 만들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한다. 1380년(우왕 6년) 8월, 왜구가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 금강 하구 진포 앞바다에 출몰한다. 이에 김사혁, 나세, 최무선이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의 함선을 불태우며 대승을 거둔다. 이때 배가 파괴되어 옥주 방면으로 도망가던 왜장 아지발도와 2만의 왜구들은 사근산성을 점령하고 함양지역을 소굴로 삼는다.
· 황산대첩
왜장 아지발도와 2만의 왜구들이 한달 넘게 남부 내륙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방화, 강간, 약탈을 일삼자, 조정은 이성계로 하여금 왜구 토벌을 명한다. 1380년(우왕 6년) 9월, 이성계의 고려군이 전북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궤멸시킨다. 이때 왜장 아지발도는 사살되고 남은 잔당들은 지리산으로 도망간다. 황산대첩은 고려와 일본의 정예부대가 사투를 벌인 최대의 전투로 그 결과 왜구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고, 이성계는 조정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 관음포전투
1383년(우왕 9년) 5월, 왜구들이 120척의 배로 남해현에 나타난다. 수군 무장인 정지가 남해현 관음포 앞바다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의 배 17척을 완파하고 2천 4백여 명을 섬멸하여 물리친다.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 무진정변
1388년(우왕 14년) 1월에 우왕의 명령을 받은 최영과 이성계가 전년에 발생한 염흥방과 조반 간의 다툼과 관련한 옥사를 빌미로 권문세족인 임견미와 염흥방 등을 숙청한 사건으로 고려 말기 권력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무진정변은 권문세족의 부패와 전횡을 비판하며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세우려는 시도였지만, 이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으로 이어져 최영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된다.
· 요동 정벌
명나라는 2월에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에 귀속시킬 것임을 알리고, 3월에 철령위 설치를 통고한다. 이에 고려는 4월에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 정벌을 단행한다. 이때 이성계는 '4불가론'(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 2. 여름에는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3. 모든 군사가 요동으로 출병하면 왜구의 침입에 대응할 수 없다. 4. 장마철에는 활에 입힌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을 이유로 요동정벌을 반대한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강행한다.
· 위화도 회군
1388년 5월, 요동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장마가 시작되어 압록강이 불어 익사자가 발생하고, 군량미는 떨어져 탈영병이 속출하였다. 이성계와 여러 장수들은 조정에 장마와 군량미 등의 문제로 회군하게 해 줄 것을 청한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그대로 요동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이성계 등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점령한 후, 최영을 유배 보내고 나중에 창왕이 즉위하자 처형한다. 그러자 1388년 6월, 우왕은 군사들을 달래는 한편 환관 80여 명을 무장시켜 이성계, 조민수, 변안령 등의 집을 급습한다. 그러나 이성계 등의 장수들이 그날 밤 숙영지에 머무르고 집에 없어 거사는 실패하고 만다.
· 폐위
이 사실을 알게된 이성계 등 회군파 장수들은 1388년 6월 우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를 보낸다. 결국 이성계 등의 신진사대부가 고려의 정권을 장악한다. 그들은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다."라고 주장하며 우왕을 폐하고 그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옹립한다. 그 후 이성계 등은 우왕의 아들 창왕마저 즉위한 지 1년 6개월 만에 1389년 11월 폐한다. 이때 '가짜 왕을 몰아내고 진짜 왕을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과 '우왕과 창왕은 역적 신돈의 자식이다'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우며,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다
사망과 가족
· 사망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여흥군으로 옮겨진다. 1389년(공양왕 1) 11월 김저와 모의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진 후, 다음 달 그곳에서 24세의 젊은 나이로 죽임을 당한다. 그의 시신은 여주군 길천면 대왕리(현재 여주시 흥천면 대당리) 산에 매장되었으나, 조선 개국 후 능은 방치되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 가족
우왕은 이림의 딸 제1비 근비 이씨, 최영의 서녀 영비 최씨, 의비 노씨, 숙비 최씨, 안비 강씨, 정비 신씨, 덕비 조씨, 선비 왕씨, 현비 안씨 등 9명의 왕비와 기생출신인 화순옹주(소매향), 명순옹주(연쌍비), 영선옹주 3명의 후궁 등 12명의 부인이 있었으며, 자식은 근비 이씨에게서만 1남(창왕)을 얻는다. 우왕은 즉위 초기에는 경연을 열어 학문을 닦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술과 여색, 사냥 등 주색잡기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한다. 심지어 기생출신을 후궁으로 봉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직지심체요절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백운화상 경한이 금속활자로 간행한 불교 서적이다. 직지는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약 78년 앞서 제작되었으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직지는 상·하 두 권으로 내용은 불교의 교리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핵심 사상과 수행 방법을 담고 있으며, 현재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직지는 한국의 인쇄 문화와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이다.
'역사 > 고려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4대 공양왕 - 출생과 즉위, 고려의 멸망, 사망과 가족, 주요 인물, 정몽주 (15) | 2025.04.13 |
---|---|
제33대 창왕 - 출생과 즉위, 치세, 폐위와 사망, 대마도 정벌, 정도전과 이색 (13) | 2025.04.12 |
제31대 공민왕 3 - 사망과 가족 및 주요 인물(이제현 이자춘 문익점) (33) | 2025.04.10 |
제31대 공민왕 2 - 공민왕 시해 사건(김용, 최유의 난) 및 신돈의 급진개혁 (8) | 2025.04.09 |
제31대 공민왕 1 - 출생과 즉위, 반원 자주 개혁 정책, 외적의 침입, 유인우 (16) | 2025.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