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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사

제20대 신종 - 만적의 난, 최충헌의 봉사 10조, 선정왕후, 보조국사 지눌

by 이야기마을촌장 2025. 3. 23.

Q고려 제20대 국왕 신종(神宗, 1144 ~ 1204)은 인종과 공예왕후 임씨의 다섯째 아들로 이름은 평량공 탁(晫)이다. 재위기간은 1197년 9월부터 1204년 1월까지 6년 4개월이다. 평량공 왕탁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한 최충헌에 의해 명종이 폐위되고 왕으로 옹립되어 신종이 된다. 신종이 즉위한 이듬해 1198년 만적의 난을 비롯하여 명주, 동경, 진주, 전주, 합천 등 많은 민란이 계속 일어난다. 신종은 자신의 뒤를 이은 희종, 강종과 함께 실권이 없는 최충헌의 허수아비 군주로 평가받는다.

신종

 

출생과 즉위

· 출생
신종(神宗, 1144 ~ 1204)은 인종과 공예왕후 임씨의 5남 4녀 중 막내인 동시에 다섯째 아들로 그의 처음 이름은 민(旼)인데 즉위한 후 금의 태조 완안아골타와 이름이 같아 탁(晫)으로 개명한다. 왕민은 1154년(의종 8년) 10세에 평량후로 책봉되었다가, 1170년 8월 무신정변이 일어나 첫째 형 의종이 폐위되고, 셋째 형 명종이 왕위에 오른다. 그 후 1182년(명종 12년) 38세에 평량공에 봉해진다.

 

· 즉위

1196년 4월,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는 이의민을 죽이고 무신정권의 새로운 실권자가 된다. 최충헌은 거사의 정당성을 알리는 국정개혁안 봉사 10조를 명종에게 올리고 이상돈, 이분 등의 내시들과 명종의 측근들을 축출한다. 1197년(명종 27년) 9월, 최충헌은 흥왕사 승통 요일이 두경승과 함께 자기를 암살하려 한다는 고변이 들어온다. 이에 최충헌은 명종을 폐하고 54세의 평량공 왕민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20대 국왕 신종이다. 이 사건을 정사정변이라고 한다.

 

 

최충헌의 무신정권 

· 형제의 권력다툼과 최충헌의 무신정권

한편 동생 최충수가 신종을 협박하여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아 외척이 되려고 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형 최충헌이 조카딸의 입궁을 막고 방해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최충수가 사병을 동원해 공격하자 최충헌은 달래 보지만 소용없어 무력으로 진압한다. 결국 동생 최충수는 최충헌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그 후 권력을 독점하게 된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무신정권의 체제를 강화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최씨 정권(최충헌(교정도감) → 최우(정방)  최항   최의) 약 60여 년간의 기틀을 마련하여 무신정권의 안정과 장기화를 이끌어낸다. 이후에도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하고 강종을 옹립하는 등 왕권을 조정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 만적의 난(1198년)

만적의 난은 1198년 5월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 발생한 신분 해방을 목표로 한 노비 해방 운동으로, 개경 북산에서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이 나무를 하던 중 효삼, 소삼 등 공사 노비들을 모아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는 연설로 선동하여 규합한다. 이들은 흥국사에 집결하여 격구장에 있는 고관대작을 습격하기로 모의한다. 거사에 성공하면 천인들의 노비 대장을 불사르고 삼한에 천인을 없애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거사 당일 모인 노비가 수백 명에 불과하자 다시 보제사에 모이기로 한다. 이 사실을 한충의 가노 순정이 주인에게 밀고하여 만적과 동료들은 체포되었고, 노비 100여 명이 수장당해 처형된다. 만적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한국 역사상 최초의 노비 해방 운동이며 중세 신분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이후 천민들의 저항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

 

· 각종 민란의 발생

명주에서는 도적 금초가 삼척과 울진현을 점령하고, 동경(경주)에서는 김순이 봉기하여 노략질을 한다. 1200년 4월 진주에서 아전 정방의의 횡포에 진주 백성들이 일어났으며, 이어서 동경, 김해, 탐라(제주도)에서도 민란이 연이어 발생한다. 초적 패좌, 태백산 도적 아지, 김순 등이 체포되자 동경 일대의 난이 완전히 평정된다. 이와 같이 각종 민란이 들끓어도 최충헌은 꾸준히 독재체제를 유지하여 나간다. 

 

 

사망과 가족

· 사망
전국이 민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으나 신종은 무기력하게 최충헌의 허수아비 노릇만 하다가, 1204년(신종 7년) 1월 등창이 악화되어 최후를 예감하고 태자 왕덕(희종)에게 양위를 한 후 6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능은 양릉(陽陵)으로 개풍군 청교면에 소재하고 있다.

 

· 가족

신종은 강릉공 김온의 딸 선정왕후 김씨로부터 2남 2녀(희종, 양양공 왕서, 효회공주, 경녕 공주)를 얻는다. 양양공 왕서는 희종이 폐위되자 강화도로 유배된다.

 

 

주요 인물

· 보조국사 지눌(1158 ~ 1210)

보조국사 지눌은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승려로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나 8세에 출가하여 1182년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을 포기하고 수행에 전념한다. 지눌은 평생 <육조단경>을 지은 육조 혜능을 스승으로 모셨으나, 특정 스승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스승과 경전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며, 깨달음을 통해 독창적인 불교 사상을 확립한다. 1188년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조직하여 참선과 교학을 함께 수행하는 운동을 시작하여 불교의 본질적인 수행을 강조한다. 중생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 '돈오'와, 이를 바탕으로 꾸준히 수행하는 '점수'를 강조하는 '돈오점수'와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수행법으로, 선(禪)과 교(敎)의 조화를 추구하는 '정혜쌍수'를 주장한다.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한 <권수정혜결사문>, <수심결>, <원돈성불론>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지눌은 조계산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국 불교의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사상은 제자 혜심을 통해 계승되었으며, 이후 조선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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