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19대 국왕 명종(明宗, 1131 ~ 1202)은 인종과 공예왕후 임씨의 삼남으로 이름은 익양공 호(晧)이다. 재위기간은 1170년 10월부터 1197년 9월까지 26년 11개월이다. 명종은 1170년 무신정변으로 옹립되어 재위기간 내내 반란과 농민봉기가 일어났으며,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의 순서로 무신들이 차례로 권력을 장악한다. 마지막으로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한 최충헌에 의해 명종은 폐위되고 평량공 왕탁이 왕이 되어 신종이 된다. 이렇듯 명종은 재위기간 내내 무신들에 의해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는 불운한 왕이었다.

출생과 즉위
· 출생
명종(明宗, 1131 ~ 1202)은 인종과 공예왕후 임씨 사이의 5남 4녀 중 삼남으로 의종의 친동생이며 이름은 익양공 호(晧)이다. 그는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문학을 좋아하였다.
· 즉위
명종은 1170년 8월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에 의한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의종이 폐위되고 평량공 왕탁이 왕으로 즉위한다. 그가 바로 고려 제19대 국왕 명종이다. 그러나 명종은 이름뿐인 왕이었고 실권은 무신 정권의 지도자인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에게 있었다.
무신정권 변천과정
명종은 1170년 무신정변으로 옹립되어 재위기간 내내 반란과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그해 주동자인 이고가 사망하자 조정은 이의방과 정중부의 양립 체제로 운영된다. 재위기간 내내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의 순서로 무신들이 차례로 권력을 장악한다. 마지막으로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되고 신종을 옹립하여 무신정권의 안정과 장기화를 가져온다. 이렇듯 명종 시기는 무신들에 의해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변화를 겪는 시기이다.
1. 이의방의 등장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주동자인 이고가 사망하자 이의방이 권력을 잡는다. 당시 문신 중심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하며 정권을 장악한다. 이때 문극겸이 승선인 동시에 용호군대장이 되어 고려 최초의 무신을 겸직한 문신이 된다. 당시에는 이의방, 이고, 채원 등이 권력을 다투고 있었으며, 정중부는 형식상 무신의 대표이지만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의방은 권력을 잡았지만 내부 갈등과 반란(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으로 인해 정권이 매우 불안정했다.
· 김보당의 난(1173년)
1173년(명종 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 등 의종 복위운동 세력이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거제도에 유배된 의종을 경주로 피신시키고 봉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무신 정권은 이의민, 박존위를 보내 김보당과 반란군을 모두 진압한다. 의종은 장수 이의민과 곤원사 연못가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이의민이 의종의 등뼈를 꺾어 죽여 버리고 시체는 동경의 연못에 던져버린다. 김보당의 난 결과 문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무신정권은 더욱 공고해진다.
· 조위총의 난(1174년)
1174년(명종 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정중부와 이의방의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조위총은 동계와 북계의 40여 성을 선동하여 조정에 대항하다가 이의방의 군대에 의해 서경으로 후퇴한다. 난이 발생한 지 22개월이 지난 1176년(명종 6년) 서경에서 항전하는 조위총은 금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이 해 12월에 무신정권은 무신정변 주동자이자 초대 집권자였던 이의방이 정중부에 의해 살해되고, 일족이 몰살되면서 정중부 체제로 옮겨간다.
2. 정중부의 집권
이의방을 제거한 정중부는 무신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로 등장한다. 그는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권력을 강화했지만, 정중부와 사위 송유인의 횡포로 무신들 간의 권력 다툼과 민란(망이와 망소이의 난)이 계속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젊은 장군 경대승은 충신인 문극겸 등이 송유인에 의해 좌천되자 정변을 일으킨다(1179년).
· 망이와 망소이의 난(1176년)
1176년(명종 6년) 충청도 공주 명학소에서 발생한 농민과 천민들의 저항 운동으로 무신정권의 수탈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다. 망이와 망소이는 명학소의 주민들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켜 공주성을 점령한다. 조정은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켜 이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결국 군사를 동원해 진압에 나선다. 그러나 반군은 예산현과 충주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결국 1177년(명종 7년)에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로 봉기는 진압되었고, 망이와 망소이는 체포되어 처형된다. 이 난으로 인하여 향·소·부곡이 폐지하게 된다.
3. 경대승의 개혁
1179년 9월, 경대승은 허승, 김광립 등 30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정중부와 그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그는 도방(都房)을 설치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문신과 무신을 고루 등용하며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노력한다. 경대승의 권력이 강화되자 이의민은 병을 핑계로 고향 경주로 도망친다. 그 후 경대승은 허승과 김광립의 만행이 심해지자 두 사람을 참수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개혁가 경대승은 1183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 전주 관노의 난(1182년)
1182년(고려 명종 12년)에 전라도 전주에서 최초로 공노비들이 주도한 봉기이다. 전주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과 무신정권의 억압에 대한 반발로 공노비와 농민, 주현군 등이 연합해 일어난다. 당시 전주 지방관 진대유는 형벌을 가혹하게 집행하고, 선박 건조를 위해 과도한 노동을 강요한다. 이에 주현군의 기두인 죽동 등 관노들이 중심이 되어 진대유를 산사로 쫓아내고, 지방 관리들의 집을 불태우며 전주성을 장악한다. 이에 조정은 안찰사 박유보를 파견해 회유와 진압을 시도했으나, 반군은 40여 일간 성을 지키며 저항한다. 결국 정부는 내부 분열을 유도해 죽동 등 주동자 10여 명을 제거하고, 잔당 30여 명을 처형하며 난을 진압한다.
4. 이의민의 집권
한편 천민 출신의 이의민은 경주에서 사병(별초)을 키우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경대승의 사망하자 심약한 명종은 이의민이 군사를 이끌고 자신을 폐위할까 봐 겁을 먹고 그를 조정으로 부른다. 드디어 개경으로 상경한 이의민은 13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그는 무신정권의 네 번째 집권자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폭정과 부패로 악명을 떨친다. 이의민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잔혹한 수단을 사용했으며, 결국 1196년 최충헌과 그의 동생 최충수에 의해 제거된다.
· 효심과 김사미의 난(1193년)
1193년(고려 명종 23년), 옛 신라지역인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무신정권 시기의 가혹한 수탈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대표적인 민중 봉기이다. 김사미는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산을 근거지로, 효심은 경상남도 울산의 초전을 중심으로 각각 봉기를 일으킨다. 두 세력은 서로 협력하며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경상도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농민과 천민 등 다양한 계층의 지지를 받으며 조정에 저항한다. 조정은 전존걸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여러 차례 군사를 파견했으나 실패를 거듭한다. 당시 신라의 재건을 꿈꾸던 이의민은 은근히 아들 이지순을 통해 배후를 지원하며 부추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전존걸이 분노를 못 이겨 자결한다. 1194년 11월, 최인과 고용지 등이 이끄는 토벌군이 밀양에서 반란군을 격파하면서 난은 진압되고, 김사미와 효심은 체포되어 처형된다.
5. 최충헌의 등장과 신종의 즉위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정권의 새로운 주도자가 된 최충헌은 거사의 정당성을 알리는 국정개혁안 봉사10조를 명종에게 올리고 이상돈, 이분 등의 내시들과 명종의 측근들을 축출한다. 1197년 9월, 최충헌은 흥왕사 승통 요일이 두경승과 함께 자기를 암살하려 한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명종을 폐위하고 평량공 왕탁(신종)을 왕위에 올리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다. 이 사건을 정사정변이라고 한다. 또한 최충헌은 동생 최충수가 사병을 동원해 공격하자 그를 제거하고,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무신정권의 체제를 강화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최씨 정권(최충헌(교정도감) → 최우(정방) → 최항 → 최의) 약 60여 년간의 기틀을 마련하여 무신정권의 안정과 장기화를 이끌어낸다. 이후에도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하고 강종을 옹립하는 등 왕권을 조정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가족과 사망
· 가족
명종은 왕비 의정왕후 김씨에서 1남 2녀(강종, 연희궁주, 수안궁주)를 낳는다. 그리고 궁인 순주, 명춘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나 이외의 많은 후궁과 폐첩들에게는 이름이 남아있는 7명의 소군(왕선사, 왕홍기, 왕홍추, 왕홍규, 왕홍균, 왕홍각, 왕홍이)과 이름이 사라진 많은 왕자와 왕녀가 있다. 명종은 궁녀 명춘을 총애하여 그녀가 사망하자 통곡하기도 하고, 연이어 궁녀 순주마저 죽자 친딸인 연희공주와 수안공주를 내전으로 불러 동침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한다.
· 사망
명종은 폐위되고 창락궁에 유폐되어 5년 동안 지내다가 1202년 9월 이질에 걸려 그해 11월,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능은 지릉(智陵)으로 의정왕후 김씨와 함께 묻혀,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두매리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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